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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새 수필

오래된 슬리퍼

by 피터K 2023. 10. 27.

2000년, 첫 직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대학원 과정동안 산학 장학생이라는 이름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 받았고 졸업하자마자 지원해 준 회사로 바로 입사하게 되었다. 그게 현대전자였다. 2월 중순쯤 신입 사원 오리엔테이션이 있다고 2주정도 합숙하는 프로그램에 참석하라고 연락이 왔었는데 제출해야 할 논문과 끝내야할 프로젝트가 있다고 설명을 하고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지 않았다. 당시 분위기를 생각해 본다면 그 2주동안 분명이 애사심을 기른다고 별의별 프로그램이 있었을거고 "현대"라는 분위기를 생각했을 때 누구 말대로 세일즈 경험도 해 봐야 한다고 조별로 뭔가 팔러 다닐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고백하자면 사실 별로 가고 싶지 않아 아직 논문/프로젝트가 남았다고 핑게를 댄 것이었다. 일반 "사원"으로 입사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박사 학위를 받고 "과장"으로 입사하는지라 어쩌면 이런 직급 + 프로젝트 마감이라는 핑게가 통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신입 사원들이 각 부서로 배정 받는 날 경기도 이천에 있는 본사에 갔었는데 나는 이미 갈 부서까지 정해져 있던 참이라 사무실에서 이사님께 인사 드리고 몇가지 물품을 전달 받는 걸로 입사 준비는 다 끝났었다. 마치 입대하는 훈련병처럼 "현대전자"라고 큼지막하게 쓰여진 체육복과 몇가지 사무용품이 주어졌고, 특이하게 슬리퍼가 하나씩 주어졌다. 

 

이천 본사의 분위기라는 것이 바로 옆에 반도체 제조 공장까지 함께 있던터라 약간 분위기가 연구소보다는 공장 분위기에 가까웠고 "현대"라는 이미지 답게 일부 군대식 문화같은 것이 있었는데 건물 입구에 들어가면 좌우로 자기 이름이 쓰여진 신발장이 있었고 거기서 이 슬리퍼로 갈아신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그 연구소 건물 300명쯤 되는 반도체 개발 인력들에게 똑같이 생긴 슬리퍼가 주어졌고 선배가 그 슬리퍼에 매직으로 이름부터 쓰라고 알려 주었다. 다 똑같으니 잊어 버리거나 다른 사람 것과 섞이지 않게.

 

그런데 나는 이천 본사에서 근무하는 것이 아닌 합병된 LG 반도체 부서에 속했기 때문에 강남 선능역에 있는, 당시 영동빌딩이라고 불리우던 건물로 출근하게 되었다. 여기는 이천처럼 입구에 신발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일반 사무실 같은 곳이었는데 이천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꽤 많아서 그 "현대" 슬리퍼를 신고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나도 하루 종일 구두 신는 것보다 편해서 그 슬리퍼를 내내 신고 일을 했었더랬다.

 

그런데 한동안 그 슬리퍼를 신고 지내 보니 고무만 덧대서 본드로 대충 붙여 만든 삼선 슬리퍼 같지는 않았고 비교적 인조가죽 소재로 꼼꼼히 바느질 되어 있는, 꽤 품질이 괜찮은 슬리퍼였다. 그리고 다른 것보다 굉장히 편했다. 내 발에 잘 맞는 건지 아니면 원래 품질 좋은 것이라 그런지 "현대전자"에서 근무하는 내내, 그리고 이름이 "하이닉스"로 바뀌었을 때도, 그리고 퇴사를 할 때까지도 잘 신었고, 그 편안함이 좋아 미국으로 올 때도 짐 속에 넣어 가지고 왔다.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집 안에서도 신발을 잘 안 벗고 생활하는 것처럼 회사에서도 신발/구두를 안 벗고 생활하지만 나는 그래도 굳굳하게 출근하자마자 슬리퍼로 갈아 신고 생활했다. 물론 회의에 참석한다거나 할 때는 슬리퍼 신고 가는게 신경이 쓰여서 신발/구두로 갈아 신긴 했지만.

 

아무리 슬리퍼가 품질이 좋아도 십여년쯤 신었다면 그대로 남아 있을리가 없었다. 워낙 튼튼해서 바느질 되어 있어 겉모습을 멀쩡해 보였지만 속 안감은 진작에 너덜너덜해졌고, 슬리퍼 고무 밑판 부분은 어느새 쩍 하고 갈라져 버렸다. 그래도 워낙 편했던지라 다 망가져 보여도 내내 신고 다녔더랬다. 2000년 회사 생활 처음 시작할 때 받아서 미국까지 들고와 2018년 산호세를 떠날 때까지 꾸역꾸역...

 

그 2018년, 정든 산호세를 떠나 오스틴으로 옮겨 가기로 했다. 다른 회사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산호세 본사에서 오스틴 지사로 옮기는거라 회사를 떠나는 건 아니었다. 산호세 본사로 마지막 출근하던 날 박스 두개에 내 책상 위 물건들을 주섬주섬 담고 나서 마지막으로 이 슬리퍼를 집어 들고는 한참을 고민했었다. 가지고 갈까 이젠 버릴까. 그냥 쉽게 버릴 수도 있는 물건임에도 그 때는 쉽게 버려지지가 않았다. 감정도 없고 반응도 없을 그냥 물건이지만 정이 들어서랄까.

 

하지만 계속 가지고 가기엔 너무나 오래되어 너덜너덜했고, 한편으로는 오스틴으로 옮겨 가면 조금은 새로 시작하자는 기분이 들어서 좀 낡은 것들은 버리는 중이었기 때문에 한참을 들고 있던 슬리퍼는 결국 내 자리에 있던 쓰레기통으로 가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 이사짐을 마저 싸고 이사짐 회사 트럭에 짐을 다 꾸려 보내고 오스틴으로 옮겨와 몇달 지낼 아파트에서 짐을 풀고, 그리고 그 중에 회사로 가져가야 할 박스 두개를 챙겨 오스틴 오피스의 새 자리로 왔을 때, 하나씩 물건들을 꺼내고 정리를 하면서 문뜩 그 슬리퍼가 생각이 났다. 분명 너무 낡아서 버려야 했고 새거 사면 되지라고 했던게 잠시 후회가 되기도 하고 지난 18년 동안 함께 했던 물건인데 사진이라도 하나 남겨 둘걸이란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살다보면 버리지 못해서 나중에 추억으로 남는 것들이 있는 반면 버렸기 때문에 추억으로 남는 것들이 있다. 남겨 진 것들은 다시 들추어 보면서 아 그래, 그 때 그랬지 웃으며 과거를 돌이켜 보지만 묘하게 버린 것들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어느 날 문뜩 기억에 떠올라 그래 그 땐 그랬었는데 하며 미소보다는 아, 이젠 없지라는 아쉬움으로 마무리되는 것 같다. 

 

얼마 후 새 슬리퍼를 사긴 했지만 그 때 그 슬리퍼만큼 편하지 않았고 그래서 더 더욱 그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했던 슬리퍼가 생각났는지도 모르겠다. 아애 잊어버렸다면 모를까 이따금 불편함 때문에 다시 생각이 난다. 슬리퍼는 그렇게 내 기억에 남았지만 어쩌면 그동안 내가 잃어 버린, 아니 버린 수많은 것들 중에는 기억에도 남지도 않아 아쉽지도 그립지도 않은 것들도 있지 않을까. 마음 속 어딘가에도 "인사이드 아웃" 속 "봉봉" 같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참 아무 것도 아닌 아주 아주 오래된 슬리퍼 하나였지만 그것 때문에 잊어 버린 많은 행복 혹은 추억이 있지 않을까 되집어 본다. 

 

꺼내지 못하고 잊어 버린 다른 행복, 추억, 기억, 물건들은 부디 나를 잊지 않고 그래 좋았었어라고 기억해 주고 있길 바래 본다. 언젠가 문뜩 그들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떠 올려 볼 수 있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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