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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새 수필

일상에서 하나씩 없어지는 것들

by 피터K 2023. 2. 25.

맨 처음 와이프가 세째를 임신한 것 같다고 이야기 했을 때, 물론 아이가 생겼다는게 반갑기도 했고 늦은 나이라 안사람의 건강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이 세명을 이제 차에 어떻게 앉혀야 하나라는 생각이었다. 

아이가 셋이 된다는 걸 정말 생각도 해 보지 않았는데 막상 나에게 닥치고 보니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내 가족을 모두 서포트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막상 막내가 태어나자 바로 내가 마주한 현실이란 건 그동안의 이런 저런 고민, 걱정해 왔던 것이 아니라 바빠진 일상 그 자체였다. 조금도 쉴 틈 없이 아이들을 돌아가면서 돌봐야 했고 나와 와이프가 한명씩 아이들을 돌보아도 하나가 남는다는 사실에 그전보다 두배 더 열심히 움직였어야 했다. 어쩌면 고민, 걱정을 할 시간 자체가 없는 때였다고나 할까.

 

그래서 인지 막내가 어느 정도 손을 덜 타게 될 때가 된 3살쯤 되고 나서야 살짝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잠시 돌이켜 볼 여유가 나긴 했다. 그런데 막상 돌이켜 보려니 그 3년은 마치 내 기억에서 순간삭제 되어 버린 것처럼 붕 떠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뭔가 바쁘게 살았는데 너무 바쁘게 살아서 뭐가 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듯.

 

그렇다고 해서 바쁜 생활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큰 애는 중학교, 고등학교로 진학을 해서 입시 준비를 도와 주어야 했고, 둘째도 학교를 다니면서 필요한 것들을 도와 주어야 했다. 특히 막내는 씻는 것부터 머리 말리기까지 전부 해 주어야 했으니 여전히 바쁘긴 하지만 그래도 그 땐 뭔가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는게 다를까.

 

아이들 손톱, 발톱 한번씩 깍아 주기.

막내는 샤워할 때 같이 들어가 머리 감겨주기

막내, 둘째는 샤워 끝나고 나면 머리 말려 주기

주말에 빨래 다 하고 나면 아이들 각각 옷 정리해서 개어 놓기

와이프가 저녁 준비하고 나면 식탁 정리하고 수저/젓가락 세팅해 놓기

식사 다 하고 나면 싱크대로 그릇들 다 옮기고 식기 세척기 안에 있는 접시들 정리하기

그나마 조금이라도 쉴 시간이라고 유튜브나 예능 보면서 설거지 하기 등등등

 

그렇게 10년 정도를 열심히 달려 온 것 같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뭔가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큰 애부터, 어느새 둘째까지 더 이상 샤워한 다음에 머리를 말려 줄 필요가 없었다.

작년부터는 막내도 자기가 알아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둘째가 내가 너무 바짝 깍는다며 손톱 발톱을 자기가 깍기 시작하더니 올 초부터는 막내도 자기가 깍는다.

한참 판데믹 때 모든 식구가 집에서 일하고 온라인 수업할 때 식사 시간 때마다 자기네들이 수저, 젓가락 놓기 시작하더니 이젠 식사 끝나고 나서 적어도 식기 세척기 안에 있는 그릇들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줄도 안다. 

그래서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유튜브나 예능 보면서 설거지하는 일만 남았다.

 

어쩌다 종종 큰애가 나 대신 설거지를 하기도 하니 어쩌면 조금만 더 지나면 이것도 아이들이 서로 돌아 가면서 할지도 모르겠다. 그 때가 되면 꿈은 우아하게 식사 후 거실 소파에 앉아 차 한잔을 마시는 모습이겠지만 현실은 그냥 핸드폰 들고 소파 구석에 쭈그리고 있는 모습일지라도.

 

예전엔 하나씩 다 해야 했던, 혹은 해 주어야 했던 일들이 어느새 하나씩 자기네들이 알아서 하기 시작하고 더 이상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는 시절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게 일상에서 해야 할 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바빴을 때는 모르던 것들, 어쩌면 너무 바빠서 생각도 못했던 것들이 이제 조금은 덜 바빠지기 시작하면서 하나씩 마음 속을 대신 채워오기 시작한다. 바로 온갖 근심들.

 

이제는 스무살이 훌쩍 넘은 큰 아이가 사회에 나가서 잘 할련지, 졸업하고 나서 취업은 잘 할 수 있을련지.

고등학교 10학년이 되면 본격적으로 입시 준비를 해야 하는 둘째는 하고 싶은 것 잘 골라 대학을 잘 진학할련지.

사춘기에 들어서는지 무뚝뚝해진 막내와 무슨 대화를 나누어야 할지.

그리고 이제 환갑이란게 10년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흠찟 놀라며 앞으로 내 노년은 어떻게 될련지.

지금 은퇴 준비는 잘 하고 있는 건지. 등등등.

 

 

그 때만 하더라도 일상이 이 바쁜 일들이 얼른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그냥 그 때가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뜩 든다. 일상에서 그냥 해야 하는 것들이 지금 돌이켜 보면 참 소소한 행복들이었고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었으니 말이다. 생각해 보면 머리 말리는 것 참 귀찮은 일었어도 아이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장난도 치던 그런 웃음 많은 시간이었다. 뭔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또 어떤 일상의 하나가 조만간 없어질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작은 바램이 있다면 그것이 없어지고 나서 아쉬워하기 보다 뭐라도 하나 있을 때 기분 좋게 하고 있기를 바래 본다. 

 

 

오늘 하루는 나에게 있어 가장 젊은 날이자 내 인생에서 가장 마지막 날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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