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의 고사
앞서 한번 말했듯이 고3때 거의 매달 모의 고사를 보았는데 당시에 유명한 입시 학원이었던 "종로학원" 혹은 "대성학원'이라는 곳에서 이 모의 고사를 전국 단위로 주관했었다. 학교에서 재량것 두 학원이 주관하는 모의 고사를 선택하는데 그 답안지에 지원하는 학교와 학과도 적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전국 단위로 보게 되니 대체로 전체 입시생의 절반 정도를 모집단으로 하는 통계치가 만들어지는데 모의 고사 성적을 받아 보면 내가 적어 냈던 그 학교/학과에 몇명이 이번 모의 고사에 지원했는지, 그 중에 몇등을 했는지, 지원자들의 점수 분포 등이 따로 제공되었다. 이제 개교한지 3년밖에 되지 않았던 학교라 대중적인 인지도도 높지 않았고 처음엔 다들 자기가 목표로 하는 소위 인서울 대학들을 주로 쓰느라 결과표를 받아 보면 지원하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았고 그 중에는 당연히 합격선에 들 수가 있었다.
86년에 개교해서 첫 학부 신입생이 87년도에, 내가 입학하던 90년도에 겨우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전교생이 다 차게된 신생학교라 그런지 누가 어디 다니냐고 물어 "포항공대" 다닌다고 하면 반응이, "아니 공부 잘한다고 들었는데 어쩌다 그런 지방 공대를..." 이란 말을 종종 듣곤 했다. 그 때는 그게 현실이었으니까.
학교 견학
그렇게 신생 학교라서 그랬는지 당시에 학교가 홍보에 꽤나 많은 신경을 썼더랬다. 종종 교수님들이 참석하시는 학교 설명회가 있었고 여름 방학 때 1박 2일로 학교 방문 프로그램도 있었다.
한번은 종로 어디쯤으로 기억하는 장소에서 학교 설명회가 있었는데 거기에 참석했더랬다. 당시 부학장님을 맡고 계시던 전자과 장수영 교수님께서 오셔서 학교에 대해서 설명을 하셨는데 마지막 질의문답 시간에 내가 용감히 손을 들고 질문을 했더랬다. 전자과에 지원하고 싶은데 지원하려면 기본적인 전자 회로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냐고. 지금 생각하면 얼굴을 붉힐 수 밖에 없는 참 철없는 질문이었지만 당시에는 뭔가 하나라도 물어 보고 싶었던 때라 그렇게 어의 없는 질문을 짜내서 물어 보았더랬다.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에 당시 장수영 교수님께서는 우문현답을 해 주셨다. 대학은 모르는 것을 배우러 오는 곳이지 아는 것을 복습하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무런 사전 지식도 필요없고 뭔가를 배우겠다는 열정만 있으면 됩니다.
35년도 더 지난 그 때의 에피소드를 아직도 기억하는 건 그 때의 말씀이 꽤나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진학할 때 영어를 전혀 모르고 처음 배웠고, 고등학교 진학할 때 미적분 하나도 모르고 들어가 처음 배웠듯이 대학도 사실 배우러 가는 곳이라는 걸 생각 못하고 있었을까.
학교 설명회와 더불어 여름 방학 때 1박 2일 학교 견학 기회도 있었다. 당시 학교 홍보과에 신청하면 참여 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포항까지 학교에서 마련해 준 버스를 타고 다녀오는데 하루를 학교 기숙사에서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그 1박 2일 동안 물리 실험 실습, 화학 실험 실습, 영어 수업 참여 등등 대학 생활에 대한 간접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포항에 도착했을 때 정문을 통해 학교로 들어 갔는데 그 때 보이던 대리석 반짝 반짝한 건물의 첫인상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 동안 사진이나 홍보 책자에서나 보던 건물들을 실제로 눈 앞에서 보았을 때의 그 전율이랄까. 학교에 대한, 아니 실제로 보게된 학교 건물의 첫인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깨끗하다라는 것이었다.
참여한 고등학생들을 몇개의 반으로 나누고 재학생 선배님들이 각각 반을 맡아 짜여진 일정에 따라 학생들을 데리고 물리/화학 실험, 영어 수업 등을 데리고 다녔다.
영어 수업에 들어갔을 때 교수님이 들어 오셔서 오늘 수업 내용이라며 프린트물을 나누어 주시고는 그 수업 50분 동안 내내 영어로만 수업하셨다. 지금이야 종종 원어민 선생님도 있고 해서 고등학교에서 일부 영어로 진행 되는 수업도 있다고 들어 봤는데 당시에는 정말 충격적인 수업이었다. 그래도 반에서, 아니 전교에서 이름을 내밀어 볼 수 있는 애들이 모였는데 수업이 진행되는 내내 누구 하나 입하나 뻥끗하지 못하고 수업이 끝나고 나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교수님의 말씀의 반은 이해 한건지 어리둥절하던 나와 다른 친구들이 모습이 기억난다. 그 수업이 특별했던 건 아니었다. 실제 입학하고 나니 영어 수업은 내내 100% 영어로만 진행되었으니 말이다.
물리 실험 실습도 기억이 나는데 oscilloscope라는 기계로 주파수에 관한 테스트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두명이 한조가 되어 실습을 진행했는데 실습 수업이 거의 끝나갈 때 한 친구가 어떤 질문을 했다. 질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질문에 대한 교수님의 대답이 기억이 난다. 이제 여러분쯤 되면 궁금한 것이 생겼을 때 무조건 왜 그런지 교수님이나 선생님에게 물어 보는 것이 아니라 한번쯤 왜 그럴까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 보아야 합니다. 이건 왜 이렇죠라고 묻는게 아니라 이건 이래서 그런 것 아닐까요라고 묻는 법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이젠 너무 시간이 오래 지나서 더 이상 자세한 것들이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때 그 학교 견학이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더랬다. 그 전까지만 해도 신문 광고나 학교 홍보 책자에서만 보던 것들을 직접 보고 경험하면서 좀 더 구체적인 목표가 생겼다고나 할까. 그래서 지난 번에 둘째가 가고 싶은 학교가 있다고 했을 때 일부러 시간 내서 찾아가 보고 캠퍼스를 함께 돌아 다니면서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기를 바랬던 것이다. 목표가 뚜렷해지면 그 방향을 향해 걸어나가기 훨씬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그 1박 2일의 짧은 학교 견학이었지만 그 때의 경험으로 남은 고3 시절은 잘 버텨낼 수 있었다. 그래 꼭 여기 가서 저 캠퍼스에서 걷고 말테야 다짐하면서 말이다.
두 장의 입학 원서
지금은 더 이상 학력고사도 아닌 수능의 시대로 접어 들어 어떤 방식으로 대학/학과에 지원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만 한국에 있는 조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선지원도 있고 후지원도 있고 또 여러 학교/학과에 지원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자세히 검색해 보지는 않았다. 검색해 보고 정리하지 않아도 한국에 계신 분들이라면 더 자세히 알테니 여기서 구지 언급할 내용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경험했던 1990학년도 학력고사 시대만 기억을 더듬이 볼까 한다.
당시는 선지원 후시험 시대였다. 먼저 가고 싶은 학교와 학과를 정한 후 거기에 먼저 지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학력고사 당일날 그 지원한 학교에 가서 전국 공통 학력 고사 시험을 치루는 것이다. 나는 이런 방식이 꽤나 오래 이어졌었다고 생각했는데 자료를 찾다 보니 이런 "선지원 후시험"은 1988년부터 93년까지였고 1982학년도부터 87학년도까지는 선시험 후지원, 즉 학력고사를 먼저 보고 그 점수로 지원을 하는 세대였다고 한다.
이 선지원 후시험 방식이면 그 학교/학과에 지원한 학생들만 서로 경쟁을 하는 셈이 된다. 당시에 서울대 공대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학과는 "제어계측공학과"였는데 학력고사 시험 성적이 좋았더라도 이 학과의 입학 정원 수 안에 들지 못하면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점수를 가지면 다른 연세대나 고려대의 충분히 좋은 다른 공과 학부를 갈 수 있음에도 그 해 대학을 진학을 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이러면 학력 고사 시험을 잘 보는 것만큼이나 경쟁률 낮은 학과에 어떻게 잘 지원하느냐도 중요한 문제가 되었고 결국 살벌한 눈치 싸움/경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아빠는 이 학교 이 학과에, 엄마는 저 학교 저 학과에, 본인은 또 다른 학교 다른 학과로 작성한 입학 원서를 들고 각 학교 접수 창고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는 경쟁률을 보고 마지막에 한명이 접수한다는 이야기가 흔하게 들리던 시대였다. 당시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어서 근처 공중전화를 이용해 집에서 대기 하고 있는 다른 가족, 할아버지, 할머니, 혹은 삼촌, 고모가 서로의 내용을 중계해 주곤 했다. 그 와중에 내용 전달이 잘 못되면 아무도 접수를 안 한다거나 아니면 중복으로 접수를 해서 입시 자체를 망쳐 버린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리기도 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고 3 수험생 뒷바라지는 모든 가족이 총 동원되는 가족의 대규모 행사이긴 한가 보다.

https://youtu.be/4A-QNC48vxM?si=APqS2eHwFJaHxSYJ
유튜브 영상 속에도 나오지만,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부르는지 잘 모르겠지만, "원서" 즉 해당 학교/학과에 제출하는 지원서는 한부에 1,000원 밖에 안 했다. 하지만 여기에 원서 내용을 작성하고 다른 추가 서류와 함께 해당 학교에 마감 시간 전까지 응시료를 지불해야 접수가 완료되고 지원이 끝난게 된다. 보통 어느 학교, 어느 학과에 지원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친구들은 일단 후보를 추린 후 그 해당 원서를 모두 구매해서 서류를 준비하고 눈치 싸움을 준비한다. 원서를 팔기 시작한 어느날 같은 반 친구가 어제 교보문고에 원서를 사러 갔다가 경험한 황당한 이야기. 자기도 원서 사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옆 줄에 어떤 학생 하나가 만원짜리 하나를 들고 하는 말이, "이것 저것 섞어서 만원어치만 주세요".....
당시만 하더라도 고등학교 졸업생에 비해 대학 입시 정원이 훨씬 적은 수였기 때문에 경쟁률이 3:1 혹은 4:1은 기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원서 가격은 1,000원 밖에 안 했지만 응시료가 낮은 건 아니어서 한 때 대학이 원서와 응시료만으로도 엄청난 수입을 올리고 있다는 기사도 있었다.
나는 이미 가고 싶은 학교 학과를 정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원서 접수가 시작되자 마자 준비 했다가 바로 접수를 했더랬다. 경쟁률 눈치 볼 이유도 없었고 차라리 내가 먼저 지원해 경쟁률을 올려 다른 학생들 지원하지 않게 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도 했더랬다. 원서를 사고 접수하는 걸 모두 아버지에게 맡겼는데 딱 하나 부탁을 드린게 있었다. 원서를 두개 사달라고. 하나는 접수 하는데 쓰고 나머지 하나는 공부하는 독서실 앞에 붙여 놓았다. 원서 옆에는 학교 전경 사진도 함께 붙여 두었는데 그걸 보면서 꼭 가야지 다짐하며 시험 공부 마무리 하던 생각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참 독했던 모양이다.
학교 뿐만이 아니라 학과도 정해서 지원했어야 하는데 모두 3지망까지 쓸 수 있었다. 1지망은 "전자전기공학과", 2지망은 "전자계산학과", 그리고 3지망은 "기계공학과"를 써 냈더랬다. 당시 "전자전기공학과" 입학 정원은 40명. 나중에 총 지원자가 딱 100명이어서 경쟁률이 2.5:1이었다. 시험 전날 예비 소집이라고 해서 공학 2동에서 가장 큰 강의실인 102호에 그 100명이 모두 모였었는데 이 중에 40명만 붙고 나머지 60명은 떨어지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니 살짝 움찔하기도 했더랬다.
학력고사
학력고사는 340점 만점이었다. 이 중에 320점은 시험 점수, 그리고 나머지 20점은 소위 "체력장"이라는 점수였다. 이 "체력장"이란 건 하루 날 잡아 온갖 운동 능력을 재는 것이다. 팔굽혀 펴기 몇회, 턱걸이 몇회, 멀리 뛰기 몇회, 100미터 달리기 몇초, 그리고 "체력장"의 하이라이트, 오후의 1000미터 달리기를 해서 기준 횟수, 시간 내로 들어오면 만점 점수를 받는 형태이다. 기준이 생각보다 넉넉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학생들이 20점 만점을 받았고 정말 정말 어쩌다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학생이 나오곤 했다. 내가 입시 준비하던 당시 우리 반에서 딱 한명 만점 받지 못한 친구가 나왔는데 그 친구는 약간 비만에 가까웠다. 그래서 턱걸이하러 철봉에 매달렸는데 10초만에 하나도 못하고 그냥 내려 왔다. 몸무게 때문에 매달려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팔굼치가 아팠단다. 아이들이 너무 공부에만 매달리고 운동 부족이라고 체력도 길러야 하니 학력 고사에 20점을 할당해 어떻게든 운동이라도 조금 시켜 보자라는 취지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책상 위 공무원 정책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학생들이 운동 부족이라고 생각하면 그 극악의 난이도 같았던 "교련" 훈련이나 빼주지.
시험 과목은 문과/이과 공통으로 국어, 수학, 영어, 국사, 국민윤리 과목이 있었다. 물론 국어/수학의 경우 문과/이과에 따라 문항과 난이도가 달랐다. 이과의 경우 여기에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중에 두과목을 선택해야 했고 제2 외국어 한과목 혹은 실업/가정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난 당시 물리와 지구과학, 그리고 제2 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했었다.
모두 4교시에 걸쳐서 시험을 보았는데 오전에 두교시, 오후에 두교시였던 걸로 기억한다. 오전 두번째 교시에 수학 과목이었는데 객관식 문제와 마지막 10문제 정도가 주관식 문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시험 보는 팁이 일단 주관식 문제부터 다 풀고 객관식 문제를 푸는 것이었다. 시간이 모자르면 최소한 객관식 문제는 답을 찍어서라도 제출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첫번째 주관식 문제가 아직도 기억나는데 바둑판 같은 격자 위에 중간 중간 호수 같은 장애물이 있을 때 한쪽 모서리에서 반대쪽 모서리까지 갈 수 있는 최단 거리 갯수를 구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combination을 이용해 푸는게 정석인데 시험 보기 한달전쯤 재수하던 독서실 형에게 쉽게 푸는 방법을 배웠더랬다. 그래서 문제지 받자마자 주관식 문제에서 이걸 보았을 때 순간적으로 속으로 "아, 됐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모자라 객관식 4문제를 미처 못 풀었는데 어쩔 수 없이 찍어서 답안지를 제출했다. 그날 밤 TV에서 방송해 주는 학력고사 정답 설명을 들으면 맞추어 보니 그 찍은 4문제중 3문제가 맞았다. 이런 생각하면 한번에 대학에 붙은게 어느 정도 행운이 따랐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방송이 끝나고 대강 계산해 보니 약 320점 정도의 점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평소 포항공대 커트라인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고 안심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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