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포스테크의 추억

POSTECH의 추억 -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학교

by 피터K 2026. 2. 27.

에필로그

 

아주 예전에, 그러니까 30년 전쯤 한참 여기저기 인터넷 보드에 취미 삼아 글을 쓸 때, 학교 BBS였던 posB에 "뽀스떼끄의 추억"이라는 시리즈를 쓴 적이 있었다. 당시에 "포항공대"의 영문 표기인 "POSTECH"을 귀엽게(?) 읽는 방법이 "뽀스떼끄"였다. 지금은 정식 학교 이름 자체를 더 이상 "포항공대"가 아닌 "POSTECH/포스텍"이라고 쓰는 걸로 들었다. 20대에 학교를 "뽀스떼끄"라고 부르는 건 나름의 귀여움이겠지만 50대에도 그렇게 부르기엔 뭔가 어색해 보인다. 그래서 그냥 이 시리즈의 이름을 "POSTECH의 추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미 글목록에 "포스테크의 추억"이라는 카테고리가 있고 거기에는 30년 전 오리지널 "뽀스떼끄의 추억 시리즈"가 남아 있다.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 새로운 시리즈로 다시 30년 전 그 때, 나의 20대로 돌아가 보려 한다. 기억이 더 가물가물해지기 전에 그냥 남겨 보고 싶은 추억들이다.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고등학교 1학년 어느날

 

막 고등학생이 되었던 1987년 어느날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 어머니가 사당역 버스 정류장 앞에서 "뉴욕제과"를 하셨는데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막 돌아온 평일이었는지 아니면 어머니 도와 드린다고 가게에 나가 있던 휴일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저 어느 하루였다. 당시 가게 테이블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었는데 거기서 신문 하단에 커다랗게 난 "포항공대"의 학교 소개 광고를 처음 보았다. 여러 학교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들, 장학금, 최신 시설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내용들이 그 광고에 가득했겠지만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는 건 광고 정중앙에 위치한 학교 캠퍼스 전경을 보여 주는 사진 하나였다. 그게 "포항공과대학"과의 첫만남이었다.

 

당시 반에서 2-3등 정도, 전교 10등 내외의 성적이었으니 조금만 더 노력하면 서울대/연고대 정도는 충분히 갈 수 있었던 성적이었다. 하지만 뭐가 눈에 씌였는지 그날 그 신문 광고를 보자마자 "아, 그래 이 학교야"하며 이 학교에 가겠다고 다짐을 했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신기하면서도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이런 뜻이겠구나라는 생각도 해 본다. 이전엔 전혀 들어 본 적도 없는 이제 막 개교한 신생학교, 그것도 낯선 시골 도시에 위치한 학교에 이렇게 마음이 가다니.

 

 

학교 초창기, 개교시 모습이다. 맨 좌측에 보이는 것이 학생회관, 빈 공터 부분은 다음 해에 공학 2/3/4/5동이 들어 선다. 그리고 가운데 부분 두 건물은 등지고 있는 것이 강당, 마주 보고 있는 것이 도서관. 그 아래로 공학 1동과 교양동, 그리고 대학 본부 건물이 있다. 그 아래 부분은 RIST라고 부르는 포항제철 산하 연구소이다. 내가 처음 방문했을 때는 공학동들이 전부 완성된 후였다. (출처: 경북일보 [포스코 50년] 기사)

 

 

모의 학력 고사

 

그 때부터 다른 학교는 쳐다 보지도 않고 이 포항공대만을 눈 앞에 두고 입시 준비를 하였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2-3개월마다 모의 학력 고사를 치루게 되는데 특이하게 거기에는 지망하는 학교와 학과도 적어 낼 수 있었다. 그러면 전국에서 그 해당 모의 학력 고사를 본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 학교와 학과에 지원한 수와 그 안에서의 내 등수, 그리고 통계치를 통해 예상되는 지원율과 모의 고사 성적에 따른 합격 여부도 알려 주었다. 학교가 아직도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고 나 정도의 성적을 가진 이들은 대부분 서울대/연고대를 1지망으로 삼았기 때문에 다른 학교/학과에 비해서 경쟁율도 낮았고 가뿐히 합격선에 들기는 했다. 하지만 87년도에 처음 개교한 후 매년 입학생들의 학력 고사 점수는 상위권을 차지했기 때문에 모의 고사 결과만으로는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막상 입시 때가 되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살짝 낮게 지원하는 경향이 있어 한편으로는 지원자가 몰릴 수도 있을터였다. 그래도 고등학교 3학년 내내 지원 학교를 쓰거나 선생님과 면담을 할 때도 한번도 다른 곳을 생각해 보지 않았고 굳굳하게 그 학교에 가겠노라고 말을 했었다. 

 

각 고등학교들은 매년 몇명이나 서울대/연고대에 보냈느냐에 따라 학교 정문에 플랭카드를 걸어 놓기도 하고 그 수에 따라 학교의 등급을 매기는, 명문학교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문화가 있었다. 그에 따라 조금만 성적이 될 것 같은 학생들이 있다면 대부분 입시 지도 선생님은 아이들을 부추겨서 일단 서울대/연고대에 원서를 쓰도록 종용, 설득, 아니면 강요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같은 반 친구도 그런 선생님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서울대에 원서를 썼는데 결국 떨어져 재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만일 그 친구가 그렇게라도 서울대 갔더라면 행복했을까?

 

나에게 다행이었던 건 입시 지도 선생님이 나에게는 그렇게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울대 경쟁 낮은 과라면 가능할지도 모를 상황에서 내가 구지 포항공대에 가겠다고 하니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원서를 써 주었던 것이 그 선생님에 대한 유일한 고마움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포항공과대학

 

학교가 처음 개교 했을 때 학교의 정식 이름은 "포항공과대학"이었다. 당시에는 단과대, 종합대 구분이 있어서 학부가 3개 이상이 되면 종합대, 그렇지 않으면 단과대라고 불렀다. 우리 학교는 개교시, 공학부와 자연과학부, 이렇게 두개만 있어서 단과대로 분류되었다. 그래서 "대학교"가 아닌 "대학"이라고 불리웠다. 이에 따라 학교 "총장"이 아닌 "학장"님이라고 칭해야 했고 그렇게 고 김호길 학장님이 된 것이다. 처음 개교할 때는 자연과학부에 "물리과", "화학과", "수학과"가, 공학부에는 "전자전기공학과", "컴퓨터 공학과", "산업공학과", "재료공학과", "화학공학과", "기계공학과"의 9개 학과였지만 89년에 "생명공학과"가 추가 되어 내가 입학한 1990년에는 모두 10개학과 한 학년 300명의 규모였다.

 

한 학년에 300명 밖에 되지 않으니 친하지는 않더라도 서로 서로 얼굴은 모두 다 잘 알고 지냈다. 게다가 1학년 때 "반"이란 개념을 도입해 한 반에 각 학부생들을 골고루 섞어 놓아 서로 다른 과 친구라도 서로 알고 지내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1학년 때는 전공 수업 없이 전부 교양 과목만 들었는데 그래서 이 "반" 친구들을 일년 내내 같이 수업 듣고 같이 밥 먹고 숙제 사는 사이가 되었다.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이 친구들이 평생 친구가 되어 아직도 한국에 가게 되면 만나는 친구들이 되었다.

 

포항에는 당시 2년제 전문대 두개만 있어서 4년제 일반 대학에 진학하려면 가까운 동국대 경주 분교내지 혹은 대구/부산에 위치한 대학까지 가야했다. 그래서 포항에 4년제 대학은 우리 학교 밖에 없었다. 시내에 나가게 되면 포항 시내 분들이 우리를 "공대생"이라고 불렀는데 친근함의 뜻도 있었고 다들 타지에서 온 학생들임을 잘 알고 계셨던지라 꽤나 친절하게 대해 주셨던 기억이 있다. 

 

입시 장벽이 조금 높았던지라 거의 대부분 타지에서 온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정말 전국 사투리는 전부 다 들을 수 있었다. 강당에서 간담회를 하는 도중 손들고 질문한 학생이 제주도 출신이었는데 말투에 제주도 사투리가 섞여서 아무도 알아 들을 수 없었다는 전설(?)도 있고, 내 경우에는 점심 먹으러 내려가는 도중에 같은 반 친구를 만났는데 나에게 "밥 묵었나"라고 묻는 경상도 사투리를 알아 듣지 못해 뭐라고, 뭐라고 몇번이나 물어 봤던 기억도 난다. 

 

 

풋풋했던 19살, 그 예전의 추억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