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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로마 여행 2023년 12월

이탈리아 여행기 - 여덟째날 나보나 광장 / 진실의 입 / 막시무스 대경기장

by 피터K 2024. 5. 20.

 

Christmas in Rome

 

크리스마스.

종교적인 것을 떠나서라도 왠지 크리스마스라고 하면 설레임과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날거라는 기대가 생기는 건 무엇때문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런 기분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닐까. 12월 20일이 결혼 기념일이고 크리스마스 즈음해서 아이들이 3주 정도 방학을 하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여행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봐야 대부분 국내 여행이고 외국에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는 이번에 두번째이다. 첫번째는 Austin/TX으로 이사 온 2018년이 결혼 20주년이라 그 때 Cancun/Mexico에 처음으로 가 보았더랬다. 그리고 이번 2023년, 결혼 25주년이라서 이탈리아, 로마에서 다시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본다.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선물 상자를 기대하고 아침에 일어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가 아직도 로마에 있다는 것을 올해의 가장 큰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긴 기지개를 펴 본다.

 

 

"로마에서의 크리스마스"라고 하면 뭔가 낭만적일지 모르겠지만 여기 저기를 둘러 보아야 하는 관광객 입장에서는 별로 반가운 날이 아니다. 대부분의 유적지/박물관/미술관들은 모두 휴관이고 그렇다고 오늘 하루, 크리스마스를 작디작은 호텔 방에서만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미국에서 출발하기 전에도, 그리고 도착해서도 저녁마다 크리스마스날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정리하고 있었다. Google에 "what to do in rome on christmas day"라고 검색하면 몇가지 아이디어가 나오는데 그 중에 몇가지는 각 성당마다 특색 있는 아기 예수 구유 장식을 돌아 보는 것, 그리고 나보나 광장의 크리스마스 시장을 가 보는 것을 제안한다. 검색을 해도 별 아이디어가 안 나왔기 때문에 미국에서 출발하기 전 짰던 일정은 나보나 광장 하나 뿐이었다. 혹시라도 시간에 쫓겨서 트레비 분수나, 스페인 계단을 놓쳤다면 나보나 광장에서 가까우니 가 보면 되겠다 싶었지만 벌써 어제 다 둘러 보고 온 참이라 오후 일정을 채워 넣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며칠동안 Google Maps을 열심히 탐색하며 찾은 곳이 호텔에서 멀지 않은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과 "진실의 입", 그리고 그 옆에 위치한 "막시무스 대경기장"이었다. 오늘은 일정은 그렇게 시작해 본다.

  

 

Church of Santa Maria della Vittoria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피렌체에 있으면서 가 보고 싶었던 장소들은, 물론 여행 책자를 참고 했지만, Dan Brown의 소설 속 로버트 랭던 교수가 나오는 영화 "Inferno"를 참고했더랬다. 그 영화에서 Duomo, 우피치 미술관 등등의 모습을 보면서 저기는 꼭 가 봐야지 하고 생각했더랬다. 그의 책 중에서 "다빈치 코드" 다음에 영화화된 소설이 "천사와 악마 (Angles and Demons)"라는 책이다. 피렌체는 "Inferno"의 여러 배경 중 하나, 첫번째 배경이라는 점에서 일부분만 다루고 있지만 "천사와 악마"는 소설 내내 배경이 로마, 그것도 로마 시내 여기 저기 유적을 헤집고 다니기 때문에 로마에 가게 된다면 이 장소들을 찾아 봐야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더랬다. 오죽하면 이 영화/소설 "천사와 악마"의 배경이 되는 장소만 방문하는 관광 코스 상품이 따로 있기도 하다.

 

그 여러 배경 중 인상 깊에 남은 조각상이 (역시)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의 법열"이라는 작품이다. 영어 이름은 " Ecstasy of Saint Teresa" 인데 누군가 이 이름을 한국어로 "성 테레사의 법열"이라고 지었다. "법열"은 불교 용어로 "진리를 깨달았을 때 일어나는 마음 속의 기쁨"이라는 뜻이란다 (나도 처음 본 단어라 검색해 보았다). 가톨릭 성인을 나타내는 작품에 불교 용어라니....

 

어째거나 소설 배경 중 이 작품 속의 천사가 가르키는 방향이 다음에 찾아가야 하는 장소를 나타내는 힌트로 사용되는데 나는 이 작품이 호텔 근처 성당이 아닌 포폴로 광장에 있는 성당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Google Maps로 찾아 보던 중 이 작품이 바로 지척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앗싸 하고 외칠 수 밖에 없었다.

 

이 성당,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은 호텔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찾아가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큰 길을 따라 갈 수도 있었다. 느긋한 아침 식사 후 산책 하듯이 걸어 찾아간 성당 앞에서 뜻하지 않은 분수상도 하나 만나게 되었다.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을 찾아 가던 길에 마주한 "모세의 분수 (Fountain of Moses)". 1585년 식스투스 5세 교황이 그의 치세를 시작했을 때 로마에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수로는 트레비 분수 근처의 Aqua Vergine이 유일했다고 한다. 그는 로마에 더 많은 깨끗한 물을 공급하기로 하고 고대 로마의 수로를 복원해 만든 것이 이 "모세의 분수"이다.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이다.

 

 

"모세의 분수 (Fountain of Moses)"는 바로 성당 정문 앞에 있었는데 사진에는 잘 안 담겨서 그렇지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크기와 비교해 봐도 꽤나 큰 분수임을 알 수 있다. 워낙 이런 종류의 분수는 로마 시내 여기 저기 있어서 특이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분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유적에 속한다.

 

고대 로마에는 여러 수원지에서 수도교를 새워 시내 곳곳에 깨끗한 물을 제공했다고 한다. 현대에는 깨끗한 물을 제공하는 방법이 상수도 시설, 화학 처리를 위한 상수도 처리장을 통하는 것이지만 과거 로마 엔지니어들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공급되는 물의 수질을 깨끗하게 유지했다. 수원지에서 끌어 온 물이 늘 흐르게 만든 것이다. 중간에 수도꼭지 같은 것은 없다. 24/7 하루 종일 그냥 흐른다. 단순한 명제 하나를 고려했을 뿐이다. 고인 물은 썩는다.

 

그렇지만 로마 제국이 더 이상 동작하지 않게 되었을 때 아무도 이 수도를 관리하지 못하게 되었고 한참 야만족의 침입으로 로마가 약탈 당할 때 아애 이 수도교를 통해 침입을 할까봐 수도를 막아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중세쯤이 되면 로마 시내에 물을 공급하는 수도는 트레비 분수 근처에 하나 뿐이었다고 한다. 로마가 가톨릭의 중심이 되어 가면서 인구가 다시 증가하게 되니 더 많은 상수도 공급이 필요해졌고 그렇게 수로를 복원해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 이 "모세의 분수"라고 한다.

 

 

"모세의 분수"를 뒤로 하고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을 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알아 보니 안에서는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가톨릭 미사는 그 순서가 정해져 있다. 그래서 사실 다른 언어로 미사가 진행되더라도 대강 어느 부분쯤인지 짐작할 수 있다.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미사가 거의 끝나고 마지막 신부님의 기도가 진행되고 있었다. 성당의 뒷자리에서 잠시 기다리니 바로 미사를 마치는 퇴장 성가가 시작되었고 신자들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준비를 했다. 보통 퇴장 성가를 하게 되면 신자들도 다 같이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그 때에는 앞쪽에 위치한 수녀님 서너 분이 작은 성가대 마냥 퇴장 성가를 부르고 계셨다. 아, 근데 그 중에 한분이 내가 들어도 참 티나게 음이 안 맞고 박자도 안 맞았다. 아, 수녀님.... 지켜 드리지 못해서 죄송....

 

미사를 마친 신자들이 나가기 시작하자 이제 밖에서 기다리던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성당 안으로 밀려 들어 오기 시작했다. 우리도 제대 쪽으로 옮겨가 성당 좌측편에 위치한 "성 데레사의 법열"을 찾아 보았다.

 

한국말로는 "성 테레사의 법열"이라고 변역되는 Ecstasy of Saint Teresa. 역시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이 작품 하나가 이 성당의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유명한 작품이다.

 

이 조각상을 비롯해 여러가지 성 베드로 성당과 다른 성당의 조각상과 성당/제단의 장식들로 유명하지만 베르니니라는 작가는 솔직히 Dan Brown의 "천사와 악마"라는 소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정말 최고의 조각가/설계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을테지만 미켈란젤로, 다빈치, 라파엘로 등의 이름에 비추어 볼 때 베르니니는 정말 생소한 이름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로마의 유명한 장소/성당들이 그의 작품으로 완전히 도배 되어 있음을 생각해 보면 조금은 의아하기도 하다. 아니 원래 유명한 건데 나만 잘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조각이 놓인 Chaple, 즉 성당 안 좌우에 안으로 움푹 들어간 작은 예배당 자체도 그의 작품이다. 이 조각상만 덜렁 있는게 아니라 아래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조각상을 중심으로 하늘에서 햇살이 내려 오는 듯한 배경, 대리석 열주, 그리고 좌우에 사람들이 관람석의 관객처럼 만들어 놓은 구도까지 전부 설계했다. 이렇게만 놓고 본다면 그는 조각가가 아니라 건축 설계사라는 말이 더 어울릴듯 싶다. 전체 구도를 설계하는 능력 뿐만이 아니라 거기에 놓일 작품까지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만능인인 셈이다.

 

매인 작품을 중간에 놓고 그 좌우로 사람들이 관람석에서 구경하는 듯한 구도로 전체를 배열해 놓았다. 작품 하나가 전부가 아니라 전체가 무대를 꾸민듯한 모습이다.

 

작품이 놓인 장소가 조금은 높은 곳에 있어 바로 눈 앞에서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천사의 모습, 성 데레사의 표정과 손 모양, 그리고 살짝 구부러진 발가락 모습까지 디테일이 너무나 자세하게 묘사 되어 있다. 성 데레사는 동명 이인인 다른 데레사 수녀(마더 데레사, 소화 데레사)와 구별하게 위해 출생지인 아빌라를 붙여 "아빌라의 데레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수녀가 되기를 바랬으며 19세에 정식으로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며 바라던 수녀가 되었다. 나중에 타락해 가는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여러 신학 저서를 쓰기도 한 교회 학자이다. 사후 성인으로 시성되었는데 이 "성 데레사의 법열"은 그녀가 자서전에 남긴 신비 체험 내용을 묘사한 것이다. 그녀의 자서전에 따르면 기도 중에 손에 불로 만든 창을 든 천사가 나타나 그녀의 가슴을 찌르자 엄청난 영적 신체의 아픔을 경험했는데 그 고통이라는 것이 비명을 지를 만큼 심했지만 동시에 느껴보지 못한 황홀감도 함께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황홀감 때문에 그 고통이 계속 되기를 바랬다고 적었다. 표현만 보면 약간 선정적인, 어쩌면 성적인 경험이 아닐까라고 이야기 하는 부분도 있지만 종교적으로 겪는 희열이 세속의 절정과 다르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그런 논란을 떠나서라도 그냥 조각 작품이라는 것으로만 보아도 작품의 표현 등은 다비드 상이나 피에타 상과 견주어도 결코 뒤쳐지지 않는 품위를 보여 준다. 

비로서 베르니니라는 작가를 제대로 알게 되는 순간이다.

 

 

반대편에 이 성당의 이름이 된 성녀 비토리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성당의 이름은 고대 로마 시대 순교자였던 성 비토리아에서 유래했다. "성 데레사의 법열" 반대편 예배당에는 Guidi라는 조각가의 "요셉의 꿈"이라는 조각상 아래 이 성 비토리아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그녀가 누구인지 어떠한 생애를 보냈는지는 그 옆에 명판에 설명이 되어 있다. 성당 근처에서 로마 기독교 박해 당시 순교자들의 지하 무덤이 발굴되고 그 안의 유해가 발견되었는데 그 유해가 순교자라고 기록된 성 비토리아라고 생각이 되어 밀납 처리를 거쳐 이 성당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인형을 만든 것이 아니라 실제 유해로 만들어진 것이라 가까이 살펴 보면 밀납이 벗겨진 부분에 뼈와 살짝 열린 입 안에 치아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살짝 소름 돋는 한 모습이긴 하지만 중세에는 성인으로 추앙되는 이가 사망하게 되면 그 신체는 부분 부분 나누어져서 각 지방/도시들의 성당으로 퍼졌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냥 그 당시의 정서로 봐서는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피렌체 Duomo 박물관에 갔을 때 지금은 그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성인 누구의 손가락이 황금 보존함에 전시된 것도 있었다. 

 

마네킹이나 모형이 아니라 실제 그녀의 유해를 밀납처리해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실제 손바닥 부분의 뼈와 입 안의 치아가 그대로 보인다.

 

 

로마 거리를 다니다 보면 흔하디 흔한 성당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아름다움 조각상들과 벽화로 가득찬 참으로 알찬 작은 미술관 같았다. 그리고 여기에 찾아 오는 사람들은 거의 100% 베르니니의 "성 데레사의 법열"을 보기 위함일테고. 급히 검색해 보고 찾아낸 장소였지만 와 보지 않았다면 후회했을 것 같은 장소였다.

 

밖에서 보면 조금은 평범해 보이는 성당이지만 저 문안으로 한발자국만 내 디뎌도 황금빛으로 가득찬 베르니니 최고의 작품과 구성으로 꾸며져 있다. 내 실력 어때라고 충분히 뽑내고 자랑할 수 있을만큼.

 

 

소매치기!!!

 

다음 목표는 나보나 광장.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에서 나보나 광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Roma Termini 있는 곳까지 걸어 나와 (그래봐야 걸어서 10분 거리) 거기서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크리스마스 당일이라 문을 닫은 가게들이 상당히 많았고 버스 티켓을 살 수 있는 상점도 문을 닫은 상태였다. 그래서 Roma Termini에 있는 메트로 지하철 역에 가서 티켓을 구매했다. 티켓은 메트로/버스 다 같이 탈 수 있는 것이라 나중에 돌아 올 때쯤은 어떻게 될지 몰라 한꺼번에 10장을 샀다. 

 

나보나 광장으로 가는 버스는 호텔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서 탈 수 있었는데 오늘은 대중 교통이 오전 9시에서 오후 1시, 그리고 오후 4시 30분부터 저녁 9시까지만 운행을 한다고 해서 그런지 버스 타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마치 평일 출퇴근 시간 마냥 사람들로 꽉꽉 들어차게 되었는데 우리 가족들도 밀려 밀려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옴싹 달싹 하지 못할 정도로 서로 꼭 끼어 있는 상태였다. 나름 Google Maps을 띄어 놓고 어디쯤 가고 있는지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살피다가 내려야 할 정거장이 바로 다음에 다가와 밀려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Excuse me"를 연발하며 겨우 내릴 수 있었다. 

 

그런데 딱 내리자마자 내 눈에 들어 온 건 활짝 열려져 있는 와이프의 백팩.

그 빡빡한 버스 안에서 와이프는 내내 나의 눈 앞에 있었고 내릴 때 분명 와이프를 앞세우고 내가 맨 마지막에 내린 걸로 기억하는데 어느새 이렇게 백팩이 훌쩍 열릴 수가 있단 말인지. 

 

로마 여행을 준비할 때 여러가지 유튜브를 통해 여행기 영상, 현지에서 가이드 하는 분들의 가이드 영상 등을 보며 수차례 로마, 아니 유럽 여행 때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와이프가 출발하기 전에 자기와 아이들이 쓸 복대 스타일의 여행용 belt bag을 구매 했고, 좀 더 많은 것들을 들고 다녀하는 난 소매치기들이 아애 처음부터 포기한다는 Pacsafe의 백팩을 준비했었더랬다. 그리고 지난 일주일 동안 별탈없이 보냈는데 결국 한번은 당하게 되었다.

 

다행이 와이프도 지갑과 스마트폰은 belt bag에 넣어 두고 있었고 백팩 안에는 중요하지 않은 것만 가지고 있었는데 하필 그날따라 작은 파우치에 Airpods가 그 안에 있었고 딱 그 파우치만 없어졌다. 그거 하나만 잃어 버린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지만 정말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복잡한 버스 안에서 내가 내내 보고 있었음에도 그 잠깐 사이에 백팩의 지퍼가 활짝 열려 있었다는 건 정말 신기하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어우 지독한 놈....

 

 

Piazza Navona (나보나 광장)

 

로마에는 여러 광장들이 있지만 나보나 광장은 원래 거기 있던 것 때문에 유명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건 바로 도미티아누스 경기장 (Circo dell'imperatore Domiziano). 서기 80년 완공 당시 약 2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로 주로 체육 운동 경기, 달리기 경기들이 열렸다고 한다. 지금의 나보나 광장은 그 폐허 위에 만들어진 광장으로 광장 모양이 딱 긴 트랙 형태를 띄고 있다. 그리고 광장 주변의 건물들은 경기장 관람석이 있던 부분에 세워진 것들이다. 크리스마스 마켓이 선다고 해서 일부러 크리스마스 날 끼워 넣은 장소이지만 나중에 돌아와 블로그를 위해 자료를 살펴 보다 보니 광장 북쪽 편에 이 도미티아누스 경기장 유적이 이 광장 아래 아직 남아 있고 이를 관람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추가하자, 로마에 다시 한번 돌아 가야 할 이유 하나 더.

 

사진에 다 담기지는 않았는데 광장 주변으로 사진에 보이는 흰색/녹색 천막들이 가득하고 그 안에서 여러가지 크리스마스 장식이라든가 아기자기한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마켓인 셈이다.

 

 

역시나 중요한 곳에서는 빠지지 않는 이집트 오벨리스크. 예전에 경기장이었다는 것은 길쭉하고 끝이 둥근 형태라는 것으로만 알아 볼 수 있다. 아이들 뒤에 보이는 분수는 "4대강 분수 (Fiumi Fountain, Fontana dei Quattro Fiumi)"라고 불리우며 역시나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4대 강은 나일강, 갠지스강, 다뉴브강, 라플라타강 (남아메리카에 있는 강으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국경)이라고 한다.

 

 

사진에는 잘 나와 있지 않지만 광장을 둘러 싸고 흰색과 녹색의 작은 천막들이 이탈리아 전통 기념품, 크리스마스 기념품들을 팔고 있었다. 흔히 어느 시골 축제에 가면 볼 수 있는 그런 장면들이었다. 아이들은 그 중에 아주 작은 소품, 미니어쳐 장식물을 팔고 있는 상점에서 한참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고, 와이프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몇개 샀다. 그 중에 하나가 La Befana라고 불리우는 크리스마스의 착한 마녀 장식이다. 나뭇가지로 만든 wreath 안에 마녀가 지팡이를 타고 있는 모양인데 너무 가냘프게 만들어져 꽉꽉 채운 짐 안에서 잘 살아 남을까 싶었는데 어찌어찌 잘 가지고 왔다. 올 크리스마스에 집 안 어딘가 장식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여러 상점들을 따라 광장을 따라가다 보면 광장 안에서 분수 세개를 볼 수 있는데 가운데 있는 것이 "4대강 분수"라는 것으로 (역시나)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이 정도 되면 베르니니의 작품이 없거나 그가 손대지 않은 장소/성당을 찾는게 어려운게 아닌가 싶다. 

 

이제 점심 시간이 되어 점심을 먹을 식당을 찾아야 했는데 광장 주변에는 식당들이 꽤나 많았다. 식당들을 대부분 광장쪽을 바라 보고 있고 그 앞에 야외 테이블을 내어 놓고 있어 광장을 보며 식사를 즐길 수 있는 낭만을 제공하려 했으나...... 이건 소위 인스타 감성이라고 할 수 있는 환상이고 현실은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크리스마스 마켓 천막들만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아니더라도 사람으로 북적대는 사람 구경이 다가 아니었을까 싶다. 결정적인 것은 Google Maps에서 보여 주는 review는 대부분 2-3점대라는 것. 

이럴 때의 진리는 역시 뒷골목. 큰 아이와 검색해 보니 바로 한 블럭만 뒤로 들어 가면 리뷰 별점 4.5가 훌쩍 넘는 식당들이 즐비했고 그 중에 한 곳을 찾아 갔다. 식당 이름은 Saltimbocca ristorate. 가격이 비싼 것도 아니었고 음식도 맛있었다. 와이프가 왠일인지 마시고 싶다고 맥주 한잔을 시켰는데 참 이쁜 잔에 담겨져 나왔다. 와이프가 이 잔이 마음에 들었는지 나한테 카운터에 가서 이 잔 살 수 있냐고 물어 보라고 했다. 그래서 카운터에 가서 "My wife really loves this beer cup...." 까지 말하고 미처 살 수 있냐고 물어 보기도 전에 직원이 몸을 뒤로 돌리더니 선반에 있는 컵을 하나 건네 주더니 그냥 가져 가라고 한다. 알고 보니 이 컵은 이 가게에서 주문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닌 맥주 회사에서 자기네 홍보용으로 나온 컵이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모양은 참 예쁜 컵이었다. 모양이 특이하거나 그런 건 아닌데 묘하게 크기에 맞게 균형이 잘 잡힌 모습이었다. 뜻하지 않게 기념품 하나 득템.

 

 

Largo di Torre Argentina (라르고 디 토레 아르젠티나)

 

맛있는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다음 행선지는 "진실의 입". 

카피톨리노 언덕 남쪽에 위치해서 있어 꽤 가야 하는 거리였지만 교통편도 마땅하지 않았고 이미 오후 2시가 가까웠기 때문에 버스도 다니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멀지만 걸어가기로 했다. 로마 시내 한복판이라고 해도 건물들이 이국적이라 건물 모양을 구경하면서 걷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골목을 돌때마다 하나씩 보이는 성당 건물들이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그 긴 걸음을 지겹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큰 길을 건너 Google Maps가 알려 주는 길을 따라 걸어 가던 중 뜻하지 않게 유적지 광장을 지나게 되었다.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이 다 그러하듯 지금의 도로 보다는 하나 낮은 지하층쯤에 위치한 유적이었는데 근처 안내판이 있어 어떤 곳인지 알아 보니 Largo di Torre Argentina. 구지 번역하자면 "Largo"는 이탈리아어로 광장을 나타내는 뜻이 있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광장을 나타내는 Piazza 보다는 작은 광장을 의미한다고 한다. "Torre Argentina"는 "아르젠티나 탑"이라는 뜻이라는데 여기서 "아르젠티나"는 지금의 남미 아르젠티나를 말하는 것이 아닌 지금의 프랑스 땅인 Strasbourg, "스트라스부르" 지방을 말하는 것으로 고대 로마 시대에 그 지역 이름이 Argentoratum "아르젠토라툼"이었다고 한다. 15세기 즈음에 "스트라스부르" 지방 출신 유지의 저택이 이 근처에 있었고 그 저택에 붙은 탑이 "Torre Argentina"라고 한다. 그래서 이 광장의 이름이 Largo di Torre Argentina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름이 15세기의 건물 이름을 딴 광장이 되었지만 고대 로마 시대에는 여기에 폼페이우스 극장이 있었다고 한다. 카이사르와 삼두정치를 함께 했던 그 폼페이우스가 건설해 로마에 기증한 건물로 반원형 극장과 부속 건물로 신전이 있었는데 당시 그 신전 건물이 종종 원로원 회의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 회의가 열리기로 한 이 신전 건물 앞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 당한다.

 

사진 중간에 홀로 서 있는 나무가 하나 있는데 거기가 카이사르가 암살된 곳이라고 한다. 폼페이우스 극장이 있던 장소라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함께 삼두정치를 이끌고 나중엔 정적이 되어 그를 무찌르고 독재자가 되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이 폼페이우스 극장의 이름을 바꾸자고 했단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내전이 끝났으니 이제는 관용이 필요한 시기라고 하며 폼페이우스 파에 속했던 모두를 사면했다. 사진 속에 보이는 홀로 선 나무 근처에 폼페이우스의 동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그는 그 동상 아래에서 암살 당한다. 그의 발밑에서 암살 당한 셈이다. 그 사건은 결국 나중에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온다. 그의 양자로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최고 권력자가 된 후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반대파의 거의 대부분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관용을 배풀면 배신으로 돌아 온다는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건물은 다 없어지고 대강의 위치만이 알려져 있을터인데 안내판에는 사진에 홀로 서 있는 나무 아래가 카이사르가 암살 당한 곳이라고 적혀 있었다. 유적지 건물 하나 제대로 남아 있는게 아닌데도 그 장소를 명시해 놓았다는게 한편으로 신기하기도, 한편으로 정말일까 갸우뚱하게 되면서도 구전의 힘이라는 걸 믿어 보기로 했다. 유럽의 역사, 특히 고대 로마의 역사에서 3월 15일이라고 하면 당연히 카이사르가 암살 당한 날이라고 알려져 있을만큼 유명한 날이니까 말이다.

 

아래 유적지로 내려가 관람할 수 있는 장소였지만 크리스마스 휴일이라 그런지 입구가 닫쳐 있었다. 그래서 우리 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난간에 기대어 아래 펼쳐져 있는 유적과 홀로 선 나무를 찾아 보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예정하고 찾아간 장소는 아니었지만 다른 장소를 찾아 가던 차에 우연히 방문하게 된 역사적 장소였다. 그래서 로마는 시간을 가지고 여기 저기 걸어 다니며 구경하기 좋은 장소인 것 같다.

 

마르켈루스 극장 (Marcellus Theater). 검투사들의 결투나 마차 경주를 진행하던 콜로세움이나 대경기장과 같은 것이 아닌 연극등을 공연하는 극장이다. 현재 로마 시대에 지어진 극장 중 가장 오래된 극장 건축물인데 역시 카이사르가 공사를 시작했고 아우구스투스가 이어 받아 완공했다. 특이하게 극장 이름을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아들인 마르켈루스을 따서 지었다.

 

계속해서 "진실의 입"이 있는 Santa Maria in Cosmedin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뜻하지 않은 또 다른 유적을 만나게 된다. 처음에 멀리서 보았을 때는 콜로세움처럼 보여 또 다른 원형 경기장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마르켈루스 극장이었다. 길가에서는 따로 안내판이 없었고 워낙 특이하게 생긴 건물이라 Google Maps에서 찾아 보고 이름을 알게 되었다.

 

카이사르가 극장의 공사를 시작했지만 완공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루어졌다. 완공 후 극장의 이름을 지어야 했는데 특이하게도 아우구스투스는 그 이름을 자기의 조카인 마르켈루스의 이름을 따서 마르켈루스 극장(Marcellus Theater)이라고 지었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누나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옥타비아였다. 그녀는 원래 결혼해서 남편이 있었지만 나중에 정략 결혼을 위해 이혼하고 2차 삼두정치의 한 축인 안토니우스와 결혼을 하게 된다. 옥타비아는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이 아들과 자신의 딸 율리아를 결혼시키려고 했다. 만일 두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면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옥타비아의 아들이 19세가 되었을 때 죽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상당히 슬퍼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완공하게 된 극장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그렇게 마르켈루스 극장이 탄생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상당히 자신의 핏줄에 집착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이 일구어낸 제국을 남의 손이 아닌 자신의 핏줄에게 물려 주려고 부단히 노력했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마르켈루스를 아꼈던 것이다. 그의 마지막 아내, 황후가 된 리비아도 당시에는 두 아들의 어머니였다. 그녀와 파티에서 첫눈에 반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냉철한 그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 이유도 이미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자기와 사이에서도 아들을 얻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두 사람 사이는 굉장히 좋았다고 하는데도 아이는 결국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두 아들 중 한사람을 양자로 삼아 2대 황제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티베리우스 황제다.

 

지금의 마르켈루스 극장의 모습은 예전 모습 그대로는 아니다. 딱 봐도 1-2층과 3층의 모양이 상당히 이질적으로 다르다. 3층은 16세기에 오르시나 가문이 르네상스식으로 궁전을 지어 지금까지 내려 오고 있다고 한다.

 

 

Mouth of Truth (진실의 입)

 

마르켈루스 극장을 지나 계속 길을 따라가면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Santa Maria in Cosmedin)"을 만나게 된다. 성당 입구 옆에 작은 porch 같은 곳이 있는데 그 한쪽 벽에 "진실의 입"이 세워져 있다. 손바닥을 올려 거짓말을 하면 전기가 통하는 거짓말 탐지기 장난감과 함께 이 "진실의 입" 모양으로 생긴 거짓말 탐지기 장난감도 있다. 중세 시대에 이 입 안에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한 사람은 그 손을 잘라도 된다고 서약을 받은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실제 "진실의 입" 뒤에서 도끼를 든 사람이 대기하고 있다가 진실과는 상관없이 심문하는 사람이 답변에 만족을 못하면 그냥 자르라고 했다고 한다. 

 

이 "진실의 입"은 "로마의 휴일" 때문에 엄청 유명해졌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관람하는 영화라는 특성 때문에 이 내용은 전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영화를 보면 남자 주인공인 그레고리 펙이 손을 넣고 정말로 잘린 것처럼 비명을 지르고 손을 옷깃에 숨진 채 빼는 장면이 나온다. 이건 사실 영화 스크립트에 있던 내용이 아니라고 한다. 촬영하기 직전 그레고리 펙이 감독과 미리 짜고 오드리 햅번을 놀리기 위해 친 장난이라고 한다. 이를 몰랐던 오드리 햅번은 100% 찐으로 놀랐고 그 장면이 그대로 영화에 담겨 있다. 아래 유튜브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진심으로 놀라 당황하는 오드리 햅번의 모습은 정말 사랑스러워 보인다.

 

https://youtu.be/6af1dAc9rXo?si=5TrHS7pm1-kM5KbI

"로마의 휴일" 속 "진실의 입" 장면의 유튜브 링크. 오드리 햅번의 찐 놀란 반응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이 "진실의 입"은 지름이 1.5m나 되어 무게만해도 1.3톤이나 된다. 그 얼굴 모습은 바다의 신 오케아누스를 딴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의 용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진실의 입"이 보관되어 있는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앞이 "보아리움 광장 (Forum Boarium)"인데 고대 로마 시대 때 그 장소는 소 시장이었다고 한다. 그곳에 "헤라클레스 신전 (Temple of Hercules Victor)"이 있는데 원래 천장에 판테온처럼 둥근 구멍(Oculus)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가 오면 안으로 쏟아져 들어 오기 때문에 그 물을 빼내기 위한 배수구 뚜껑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혹은 소 매매 상인들이 신전에 제물로 바친 소 제물의 피를 배출하기 위한 배출구 뚜껑이라는 설도 있다. 정확한 용도는 모르지만 13세기쯤 신전에서 옮겨져 성당의 벽에 기대에 놓았다고 알려지고 있으면 17세기에 성당 안 porch 구역 안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왔노라 보았노라 넣어 보았노라"...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몇명이나 저 입에 손을 넣어 봤을까.

 

 

Circus Maximus (막시무스 대경기장)

 

안전하게 모두의 손을 간직한 채로 마지막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당에서 나와 바로 뒤쪽으로 돌아 언덕을 조금만 올라 가면 눈 앞에 광활한 개활지가 펼져져 있다. 이 장소가 "막시무스 대경기장 (Circus Maximus)" 유적지이다. 영화 "벤허"에서 전차 경주가 벌어지던 그 장소이다. 지금은 남은 건축물이 하나도 없고 경기장 부지만 남아 있기 때문에 영화에서 보던 그 웅장함을 바로 느낄 수는 없지만 막상 경기장 부지로 내려가 그 안에 서 보면 반대편 끝이 저 멀리 보이면서 규모를 실감하게 된다. 경기장 부지는 따로 입장 하는 곳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비탈을 내려가면 그 안을 거닐어 볼 수 있다. 기나긴 경기장 부지를 걷다보면 좌측편으로 언덕 위 팔라티노 황궁 유적이 보인다. 고대 로마 시대의 상상도를 찾아 보면 거대한 경기장 건물들, 관람석과 함께 팔라티노 황궁이 그 위쪽에 위치해 있는 걸 알 수 있다. 황궁에서 경기장으로 바로 내려 올 수 있었다는 설명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정확히 출처를 못 찾았다. 내려 오지 않더라도 그 황궁 위에서 본다면 경기장을 훤하게 볼 수 있는 위치이기는 하다.

 

아무런 설명이 없다면 대체 이 황량한 공간은 뭐지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이 정도 규모의 경기장이라면 정말 엄청났을 것 같다.

 

네마리 말이 끄는 전차들이 이 넓은 트랙을 달리고 있다면 오늘날의 F1 경주와 비슷했을 것 같다. 얼마나 흥분되고 멋진 장면일까 상상을 해 볼 수도 있지만 그냥 영화 "벤허"를 보면 된다. 그냥 상상 그 이상이다.

 

바로 건너편에 팔라티노 황궁 유적이 보인다. 며칠 전에 저 유적 뒷편에 서 있었다는게 믿기지 않는다. 정말 저 황궁이 멋지게 서 있었다면 엄청난 장관이었을거라 생각한다. 저렇게 유적지에 조명을 비추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데 말이다.

 

처음 세워진 것은 공화정이 시작되기 전인 왕정 시대 때라고 하는데 그 때부터 이런 웅장하고 거대한 모습은 아니었고 조금씩 추가가 되면서 커지게 된거라고 한다. 규모가 규모인지라 처음에는 모두 목조로 지어졌는데 대대적으로 확장된 건 카이사르 때였다고 한다. 이 분은 갈리아도 정복하고 내전도 치루고 공화정에서 제국으로 넘어가는 초석도 만들어가는 도중에 이런 건축물도 정말 많이 시작했다. 물론 중간에 암살 당하는 바람에 뒷처리는 다 아우구스투스의 몫이었지만, 그래도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이 때 지금의 길이인 621m가 정해졌다. 전체 수용 인원은 15만명 수준이었다고 하니 최대 8만명이 수용인원인 콜로세움의 두배 정도 된다고 보면 되겠다. 그런데 전체 규모를 생각해 본다면 콜로세움이 대단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목조로 지어져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화재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일부가 소실된 화재가 몇번 있었고 기원전 31년에 발생한 화재로 아우구스투스가 재건을 한번 했는데 그 때 이집트에서 오벨리스크를 가져와 경기장 한복판에 세웠다고 한다. 이것이 로마로 들어온 첫 오벨리스크였다고 한다. 아마 이때부터 이집트 오벨리스크를 들여 오는데 재미를 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총 2개의 오벨리스크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 하나는 나중에 포폴로 광장으로 옮겨져 지금은 거기에 서 있다고 한다. 기원 후 64년 네로 황제 치세 때 로마 도심 전체를 휩싼 그 유명한 로마 대화재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민심이 흉흉해졌을 때 그걸을 달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사람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경기장은 금방 복구 되었다고 한다. 목조 건물인 이상 화재는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트라야누스 황제 때 아애 석제로 만들기로 결정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라고 하니 약 기원후 300년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그 때에는 경기장이 무너져 13,000명이 사망한 기록도 있다. 

 

이렇게 유적지 부지만 있는 경우 상상력의 최대를 발휘해야 한다. 콜로세움처럼 기초 골조라도 있으면 상상력을 그 위에 조금만 더 더하면 되겠지만 이 경기장은 대략 난감이다. 그냥 횡한, 어쩌면 그래서 더 규모가 느껴지는지 모르겠지만 아무 생각이 없다면 그냥 황량한 공원 그 자체이다. 그래서 제일 좋은 방법은 영화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을 보면서 직접 본 이 경기장을 대입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엄청난 경기장이 지금은 아무 것도 안 남은 모습이 측은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 긴 경기장을 끝에서 끝까지 걸어 건너편에 도착했다. 바로 그 코너에 메트로 역이 있다.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미리 표를 사 두어서 번잡스럽지 않게 메트로를 탈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밤이라 그런지 열차에 사람도 많지 않아 쾌적하게 호텔까지 돌아 올 수 있었다. 이미 해가 넘어가 어둠이 깔렸지만 하루 종일 걸어서 돌아 다닌지라 호텔에서 조금 쉬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로 했다. 로마에 오기 전에 일정을 짤 때 크리스마스 날이 많이 가장 고민이 많았는데 여러가지 제약이 많았기 때문이다. 많은 미술관/박물관들이 문을 닫는데다가 여행책에서도 많은 식당들이 문을 닫는다고 나와 있었다. 그 책에서 조차 크리스마스에 문을 여는 식당을 미리 알아 두거나 문을 여는 식당들도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릴 수 있기 때문에 예약을 해 두라고 조언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Roma Temini에서 호텔까지 걸어 오는 동안 많은 식당들을 지나게 되는데 반 이상은 문을 닫았었다. 아직 반이 열려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선택이 좁아진다는 문제도 있다. 익숙한 걸 찾아 먹는 것이 아니라 잘 모르는 것을 골라 먹어야 한다면 어려움이 하나 더 더해진다.

 

어쩔 수 없이 방에서 잠시 쉬는 동안 Google Maps를 통해 검색을 하고 리뷰도 찾아 보면서 찾아낸 곳이 근처 중국 식당이었다. 식당 이름은 XiangYueGe Chinese Restaurant. 리뷰 별점은 무려 4.8. 여기다 싶어서 무거운 몸을 추스려 식당으로 찾아 갔다. 기억에 거의 8시가 가까웠던 시간이어서 사람이 많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앞에 벌써 서너 팀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식당이 생각보다는 작은데다가 홀에서 서빙하는 분은 한 분 뿐이었다. 다른 곳을 갈까도 싶었지만 딱히 갈 곳이 마땅하지 않아 20여분 정도를 기다린 다음 식당에 들어 갈 수 있었다. 서빙하는 분만 한분인게 아니라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분도 한분뿐인 것 같았다. 각자 먹고 싶은 걸 하나씩 주문 했는데 보통 같은 테이블의 요리는 함께 나오는데 여긴 준비 되는대로 하나씩 하나씩 나와서 음식이 먼저 나온 사람이 다 먹었는데도 마지막 주문은 아직 나오지도 않은 상태였다. 전체적으로 맛은 리뷰처럼 좋았지만 경험은 그만큼 좋지는 않았다. 아마도 크리스마스 날이라 서빙 하는 사람도 적고 요리사도 적어서 그렇지 않았을까 추측은 해 본다. 다시 로마에 돌아 간다면 평일은 어떤지 한번 보고 싶다.

 

 

 

오늘은 25일, 집으로 돌아가는 날은 27일이지만 돌아가는 날은 아침 7시 45분 비행기를 타야 하므로 사실상 로마에서의 마지막 날은 내일뿐이다. 하루 하루를 어딘가 다녀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부지런지 계획을 짜고 아침부터 서둘렀지만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그냥 하루 아침에 일어나 로마의 햇살을 맞으며 테라스 같은 곳에 앉아 커피를 한잔 하며 아무 것도 안 하면서 하루를 여유롭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에 다시 한번 온다면, 아니 꼭 다시 돌아 오겠지만, 하루는 그렇게 계획을 짜 보아야겠다. 

아무런 스케줄도 없는 그런 하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