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중심, 포로 로마노
너무 자주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 같지만 이야기를 풀어 나가려다 보면 이 책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15권이나 되는 그 책에서 우리가 잘 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제외한다면 그 다음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가 바로 "포로 로마노"가 아닐까 싶다. 이탈리아어로는 포로 로마노 (Foro Romano), 영어로는 로만 포룸 (Roman Forum)인 이 장소는 그냥 그 자체로 로마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로마는 7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도시이고 첫 정착민들이 각 언덕들을 하나씩 차지하고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로마 자체가 여러 건물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이 7개의 언덕이 어디쯤 있는지 어떤 것이 언덕인지 알아 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금방 알아 볼 수 있는 두 언덕이 있는데 포로 로마노 남쪽의 황궁이 있는 팔라티노 언덕과 그 북동쪽의 카피톨리노 언덕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언덕들도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걸로 아는데 지리 상으로 보면 이 포로 로마노는 그 7개의 언덕의 중간쯤 되는 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교류를 위해, 혹은 장사를 위해 자연히 모이게 되는 장소가 된 것이다.
직접 방문해 보면 알겠지만 포로 로마노는 상당히 저지대에 있다. 그러다 보니 비가 오거나 하면 쉽게 물이 고이는 습지대였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공동의 만남의 장소로 모이기 시작하자 간척 사업이 시작되었고 배수 시설도 생겨 물이 한 곳에 모여 티베레 강으로 빠져 나가도록 했다. 그 배수 시설은 아직도 거기에서 볼 수 있다.
사람이 모이면 시장이 생기고 시장이 생기면 사람은 더 많이 모이게 된다. 그러면 그 장소는 집회의 장소가 되고 공공 건물들이 들어서게 된다. 그렇게 포로 로마노는 점점 모든 로마인들 일상 생활의 중심이 되어 간다. 그러다 보니 과시를 위해서라도 황제들과 유력 인사들은 더더욱 공공 건물들을 세워 로마에 기증하기 시작하고 건물들도 차츰 화려해진다. 콜로세움이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이유도 포로 로마노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로마의 시작과 함께 포로 로마노도 시작되었듯이 포로 로마노의 내리막도 로마의 내리막과 함께 한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포로 로마노도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지역이 되었고 중세 시기를 거치는 동안 사람들은 다른 건물을 건축하는데 포로 로마노 내에 남아 있던 건물들에서 자재를 가져다 썼으며 원래 저지대였던 만큼 시간이 지나면서 밀려 오는 토사에 점점 묻히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완전히 다 묻힌 것도 아니고 사람들은 기록과 기억을 통해 이 장소가 포로 로마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폐허가 된 이 장소를 방문해서 기록과 그림을 남겼다. 그리고 1890년대가 되어 이탈리아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굴 작업을 시작한다. 그렇게 포로 로마노는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
"로마인 이야기"에서 두번째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일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고대 로마 시대를 이야기 하려면 포로 로마노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탈리아, 로마 여행을 계획했을 때, 아니 그 전부터 포로 로마노는 꼭 가보고 싶은 1순위였다. 물론 방문한다면 남아 있는 건물은 거의 없고 기둥 바닥만 남아 있을 폐허지에 불과하겠지만 나머지 부분은 내가 상상하던 모습으로 채우면 된다.
그렇게 고대 로마의 중심지, 포로 로마노로 간다.
다른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포로 로마노도 입장권을 미리 인터넷으로 예매를 했다. 포로 로마노 입장권은 포로 로마노, 팔라티노 언덕, 그리고 콜로세움까지 세 장소를 모두 방문할 수 있는 티켓으로 파는데 입장 시간을 정해야만 했다. 이미 호텔을 예약했으니 호텔부터 포로 로마노까지 얼마나 걸릴지 대강 계산해 볼 수 있었고 그래서 9시 30분 정도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9시 30분을 입장 시간으로 정했다. 원래 이런 예약 시간을 잡고 나면 반드시 그 시간에 맞추어야 하는 수퍼 J 성향이라 당일 아침에도 서둘렀을텐데 피렌체와 폼페이에서 경험해 보니 이 예약 시간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미리 예매했던 다른 입장권들도 대부분 입장 시간이 정해져 있었는데 엄격하게 확인했던 Palazzo Vecchio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찍 가거나 늦게 가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포로 로마노도 그럴 줄 알고 가족들을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아침 식사 후 로마 시내의 길을 따라 포로 로마노 입구에 10시 조금 넘어 도착을 했다.
그런데 막상 입장을 하려고 예매 티켓을 내미니 안내원이 살펴 보고는 제지를 한다. 입장 시간이 9시 30분인데 늦었다는 것이다. 순간 멘붕.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으니 안내원이 설명해 준다. 이 9시 30분 입장이라는 것이 콜로세움 입장 시간이라는 것이다. 티켓을 자세히 살펴 보니 이탈리아어로 쓰여진 티켓 밑에 영어로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Valid 24 hours from the first usage for 1 entrance to the colosseum on 23/12/2023 09:30".
그냥 9시 30분 이후에 아무 때나 입장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유적지 건물 자체에 올라야 하는 콜로세움의 경우 너무 많은 사람이 한번에 몰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입장 시간을 정해 놓았던 것이다. 나머지 포로 로마노, 팔라티노 언덕은 콜로세움 방문 후 24시간 내에 아무 때나 입장 할 수 있다. 아 낭패다 하고 당황하고 있는데 안내원이 내 표정을 보더니 티켓을 달라고 받아가더니 자기네 티켓 부스로 갔다. 조금 있다가 돌아와 설명하기를 일단 포로 로마노 입장을 지금 시켜 줄거고 콜로세움쪽 티켓 부스에 이야기 해 두었으니 나중에 콜로세움 티켓 부스 9번(10번이었나?)에 가서 새로운 입장 티켓을 받으라는 것이다. 이 설명을 해 줄 때는 정말 너무 너무 고마웠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고 그 안내원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내가 가장 기대하던 장소를 방문하지 못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다행이도 고대하던 포로 로마노로 입장할 수 있게 된다.
2000년전 세상의 중심에 서다
미국 뉴욕의 센트럴 파크를 방문한다면, 아니면 타임 스쿼어 한폭판에 선다면 아마 누구나 세상의 중심에 섰다고 느낄 것이다. 지금의 세계는 사실상 미국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9.11 테러가 뉴욕에서 일어 났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만약 2000년전 고대 로마 시대에 이 포로 로마노를 방문했다면 그 누군가는 분명 이렇게 느꼈을 것이다. 나는 세상의 중심에 섰다라고.
그 당시 세상의 중심이었을 포로 로마노도 서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버려졌고 세월의 흔적 안으로 숨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 이 포로 로마노를 걷다 보면 과거의 그 영광을 상상하게 되면서도 현재의 폐허 안에서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입구에서 내리막 길을 따라 내려 오면 바로 포로 로마노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 거기서 우측 방향으로 포로 로마노의 본 광장 부분이 펼쳐져 있고, 좌측 방향을 바라 보면 여러 공공 건물/신전의 유적이 남아 있는 작은 언덕을 볼 수 있다. 그 언덕 너머에 콜로세움이 자리하고 있다. 포로 로마노의 감상은 우측 방향에 놓인 메인 광장 쪽으로 움직이며 시작한다. 비록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기둥의 밑둥만 남아 이곳에 어떤 건물/신전/회당이 있었다고 말해 주는 건물터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그 건물터 앞에는 과거 이 곳이 어떤 장소였는지 이름과 간단한 설명이 적힌 안내판이 자리있다. 그런 건물터 유적 너머 저 멀리 개선문이 하나 보이는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이다. 포로 로마노 내에서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는 몇 안되는 구조물이다. 그 방향으로 걸어 가다 보면 우측에 아밀리아 회당 (Basilica Aemilia, 영어로는 Basilica Emilia) 터가 보이고 그 기둥의 잔해가 남아 있다.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회당으로 알고 있는데 회당/Basilica이라는 장소는 장사, 법률 상담 등 사람들의 교류가 이루어지던 큰 공간으로 보면 된다. 그 앞을 지나갈 때 곁에 신혼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한국말로 대화하는 것을 들었다. "바실리카라고 하네", "옛날에 교회가 있던 자리인가봐".
영어로 된 안내판에 Basilica라고 적혀 있기 때문에 오해를 한 듯 싶었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 생긴 건물이 교회 건물일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어떤 곳이었는지 조금 알고 왔다면 관람이 조금 더 풍성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거기서부터 개선문까지 가는 길 중 좌측 부분이 포로 로마노의 중심, 메인 광장 부분인데 카이사르가 독재관이 되기 전 독재관을 지내며 로마를 공화정으로 되돌리려 노력했던 술라가 그 바닥을 전부 대리석 판석으로 깔았다고 한다. 서로마 제국이 무더질 때까지 비교적 잘 유지되었었다고 하니 전체가 대리석으로 깔린 광장은 생각만해 봐도 참 멋있었을 것 같다. 지금은 대리석 바닥 아래에서 발굴된 배수구를 볼 수 있는데 위치상 낮은 곳일 수 밖에 없어 고이게 되는 물을 이 배수구를 통해 티베레 강까지 빼 냈다고 한다.
100% 온전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은 바로 앞까지 다다가서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서기 203년 파르티아, 지금의 이란, 이라크 지역에 위치한 제국을 상대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것인데 그래서 아치 부분의 부조를 보면 파르티아와의 전쟁 승리 모습을 그려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화려함과 정교함에 한참을 올려다 보게 된다.
개선문 뒷편으로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지금은 중간쯤에서 막혀 있고 주변에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황제 신전의 기둥 세개만이 높게 솓아 있는 걸 볼 수 있다. 길을 다시 내려와 이번엔 광장을 좌측에 두고 반대편 길로 걷다 보면 우측에 또다른 회당, 율리아 회당(Basilica Julia) 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크기는 거의 광장 크기와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데 이 회당을 지은 이가 우리가 잘 아는 그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갈리아 전쟁을 끝내고 나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포로 로마노에 커다란 회당을 지어 로마에 기증하기로 하고 갈리아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팔아 그 돈으로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짓는 도중에 암살 당해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마무리한 건물이지만 그 이름은 남겼다. 카이사르에게는 유일한 혈육인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는 나중에 자신보다 30살이나 더 많았던 카이사르의 삼두정치 파트너 폼페이우스와 결혼한다. 사실상 삼두정치를 이어나가기 위한 정략결혼이었지만 의외로 두 사람은 무척이나 금실이 좋았다고 한다. 그 덕분에 폼페이우스가 삼두정치로 인해 손해를 보고 있음에도 카이사르를 배신하지 못했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녀는 나중에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되는데 그 때부터 삼두정치가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녀의 이름이 율리아 카이사르. 이 회당이 그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포로 로마노의 메인 광장은 사실 상 이 정도가 전부이고 거기서부터 반대편 콜로세움으로 이어지는 언덕을 따라 있는 건물들은 포로 로마노의 부속 건물들이라고 보면 된다. 각종 신전, 관공서 건물들이 그 언덕길을 채우고 있다. 이 곳에서 우측 방향을 향해 가다 보면 팔라티노 언덕으로 올라가는 램프가 있는데 아치 형태의 동굴처럼 생긴 오르막처럼 보인다. 계단없이 현대식 건물의 휠체어가 오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램프와 비슷한데 포로 로마노 아래에서 언덕 위 황궁으로 바로 이어져 있다. 영어로 Imperial Roman Ramp라고 부른다는데 황제가 팔라티노 언덕 황궁에서 포로 로마노로 내려 오거나 다시 올라 갈 때 사용하기 위해 서기 80년대쯤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길을 통해서 팔라티노 언덕으로 올라 가기 전에 메인 광장 끝쪽에 카이사르 신전 터가 있다. 윗 건물은 다 무너져 기단만 남았는데 마치 동굴 모양처럼 기단 안에 공간이 있다. 위 사진에서 우측 중간쯤 보면 회색 지붕 같은 걸로 덮여 있는 부분이다. 그 앞을 지날 때 가이드가 한 그룹에게 열심히 뭔가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이탈리아 말로 설명하고 있어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는 못했고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이 곳이 어느 곳인지 몰랐다. 다만 그 동굴처럼 된 공간 안을 들여다 보았을 때 여러 개의 꽃다발이 있어 의아해 했더랬다. 나중에서야 그 곳이 카이사르 신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장 앞에서 암살 당했다고 해서 이 포로 로마노 한켠, 셉티무스 세베루스 개선문 앞에 있는 그 원로원 회의장인줄 알았다. 그런데 당시 원로원 회의장은 따로 정해진 곳이 없었으며 원로원 회의가 열리게 되면 모이는 장소까지 함께 공지했다고 한다. 암살은 이 곳이 아닌 여기와 나보나 광장의 중간쯤 되는 장소에서 일어났지만 장례식은 이 포로 로마노 광장에서, 지금 카이사르 신전이 있는 곳에서 열렸다고 한다. 물론 이 신전은 나중에 그의 양아들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로마식 장례는 화장인데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옷가지, 나무가지 등을 계속 집어 던지는 바람에 불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포로 로마노 일부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 때 갑자기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카이사르의 화장된 유해는 수습할 틈도 없이 그 비에 그대로 휩쓸려 티베레 강으로 흘러가 버렸단다. 지금의 유럽을 만든 사람, 로마를 공화정에서 제국으로 만든 사람, 그 이름 자체가 나중에 황제를 뜻하는 말이 되어 버린 그런 사람의 마지막은 이렇게 극적이 된다. 유해가 수습되어 어딘가 근사한 무덤이 만들어졌다면 그 당시 화려한 어떤 건물로 남았겠지만 하드리아누스 영묘가 결국 약탈과 중세를 거치는 동안 산탄젤로성이 되어 버린 것처럼 그의 무덤도 결국 그렇게 황폐화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는 무덤을 가지지 않고 그대로 테베레 강으로 흘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제국의 내해인 지중해로 흘러가 버렸다는 것이 카이사르에게는 더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그는 전설이 되었다.
팔라티노 언덕 (Palatino / Palatine Hill)
포로 로마노에 바로 붙은 팔라티노 언덕은 로마의 첫 정착지라고 알려져 있다. 역세권이라는 말도 있듯이 팔라티노 언덕은 포로 로마노 바로 옆이라는 위치 때문에 그 이후에도 소위 부촌이 되어 갔다고 한다. 그 언덕에 집을 가졌다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여겨졌다고 할만큼. 그러다보니 공화정이 끝나고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 되었을 때 그 언덕에 있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집으로부터 시작해 조금씩 조금씩 주변 집들을 매입해 황제를 위한 공간들로 채워지기 시작해 나중에는 그 언덕 전체가 황궁이었다고 한다. 백악관이나 예전 청와대은 최고 권력자의 생활 공간일뿐만이 아니라 집무실의 역할도 하는 것처럼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은 거주지뿐만이 아니라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정부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언덕 위 궁전은 로마 어디에서 보았을 때도, 또 포로 로마노에 모인 사람들이 보기에도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포로 로마노는 그 낮은 위치 때문에 점점 흙에 묻히게 되었지만 언덕 위 건물들은 고스란히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화려했다는 팔라티노 언덕 황궁 자리에 올라가 보면 건축물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중간 중간 건물이 있었다는 것만 보여 주는 건물터와 그 기단 밑둥들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자세히 둘러 보면 그 폐허 자체가 이야기가 되는 부분들이 많다.
포로 로마노의 메인 광장의 율리아 회당이 끝나는 부분에서 우측으로 Imperial Roman Ramp를 따라 동굴처럼 생긴 오르막을 따라 가다 보면 중간에 전시실이 양쪽에 있다. 들어가 보려 했더니 입구에 계신 분이 이 전시실은 추가 입장권이 있어야 관람이 가능하다고 했다. 나중에 티켓 구매 했던 사이트에서 다시 확인 했을 때 티켓의 종류는 한가지만 있어 어떤 추가 입장권이 있어야 방문이 가능한지 알 수가 없었다.
Ramp의 끝에 도착하면 팔라티노 언덕에서 포로 로마노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가 나타난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팔라티노 언덕 안쪽으로 가는 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따라 가다 보면 마치 동굴 안에 만들어 놓은 듯한 방들의 유적이 나타난다. 이 방들은 티베리우스 황제의 궁전 유적이다. 초대 황제의 양아들로 2대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의 거주지가 원래 여기였다고 하며 점차 다른 황궁의 건물들과 어우러져 전체 황궁의 일부를 이루게 된다. 이 티베리우스 황제의 궁전은 Domus Tiberiana라고 불리우며 Domus는 라틴어로 집의 의미이다.
원래 궁전/집의 모습이었는데 폐허가 되어 가면서 동굴처럼 변해 버린 것인지 아니면 폐허로 묻혔다가 나중에 발굴되면서 이런 형태를 갖추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곳이 티베리우스 황제 궁전 유적이란 설명이 없다면 당시의 움막 동굴집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될 정도였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궁전을 지나 계속 가다 보면 뜻하지 않게 상당히 멀쩡한 건물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건 당시 로마 시대의 건물이 아니라 중세에 만들어진 건물이다. 팔라티노 언덕이 폐허로 버려져 있을 때 1550년 파르네세 추기경(Cardinal Farnese)이 티베리우스 황제 궁전 폐허 위에 식물원을 만들었고 그의 이름을 따서 파르네세 정원(Farnese Gardens)이라고 불리운다. 이 정원은 유럽 최초의 개인 식물원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보면 식물원보다는 말 그대로 정원에 가까운 모습이고 팔라티노 언덕의 북동쪽 꽤나 넓은 부분을 차지 하고 있다. 이 정원의 아랫 부분이 대부분 티베리우스 황제 궁전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궁전 지붕 위에 만들어진거라고나 할까. 파르네세 정원 끝 부분에 서면 좀 더 높은 곳에서 더 넓게 포로 로마노를 비롯, 멀리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로마 전체를 관망할 수 있다.
파르네세 정원에서 벗어나 언덕의 뒷편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면 거기서 부터 본격적으로 팔라티노 황궁의 유적이 나타난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대부분 기단 부분만 남은 폐허들이 전부지만 그 길을 따라 다니다 보면 전체 황궁의 크기가 당시에는 어마어마 했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땅 윗 부분의 건물들은 약탈과 다른 건물 건축을 위한 자재로 다 휩쓸려 나갔지만 파르네세 정원 뒷편으로 가다 보면 뜻하지 않은 유적들을 만나게 된다.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집/궁전, 그리고 그 아내였던 리비아의 집/궁전터이다. 집/궁전이라고 함께 표기한 이유는 안내판에는 전부 Domus라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아우구스투스의 궁전터는 들어가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역시나 다른 종류의 티켓이 있어야 한다고 되어 있고 앞에 직원이 따로 입장을 관리하고 있었다. (무슨 종류인지 꼭 알아내서 다시 가게 된다면 반드시 들어가 보고야 말리라.....)
다시 발길을 돌려 팔라티노 언덕의 뒷편, 콜로세움 방향으로 가다 보면 지표면에서 아래로 푹 꺼진 커다란 운동장, 혹은 정원 같은 부분이 나온다. 규모만으로 보았을 때엔 마차 경주도 할 수 있을만큼 크고 넓은 축구 경기장처럼 생겼는데 말 그대로 Stadium 혹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에 만들어져 Domitian's Stadium이라고 불리운다. 정확한 용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하는데 주위를 열주들이 늘어서 있는 2층 테라스가 있었다고 한다.
전성기의 시절에는 지금의 버킹험 궁전이나 베르사이유 궁전만큼이나 화려했을 장소였겠지만 지금은 굴러다니는 돌맹이 무덤 정도에 불과한 모습을 보면서 이건 아무리 상상력이 좋아도 그 나머지를 채울 수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렇게 남아 있기 때문에 그 과거의 영광이 더 찬란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어설프게 남아 있는 건물보다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상상을 해야 하는, 어쩌면 그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야 하는 추상을 그려야만 이 곳이 정말 고대 로마의 황제들의 자리였구나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버킹험 궁전이나 베르사이유 궁전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때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 그리고 스스로를 태양왕이라 불렀던 이가 머물렀던 장소로 그 영광과 함께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그 영광은 다 어디론가 없어지고 덜렁 그 건물만 남아있다. 건물 외관과 내부는 여전히 화려하겠지만 이젠 그것뿐이다. 마치 다 몰락한 귀족이 옷만 번드르하게 입고, 나 아직도 안 죽었어라고 으쓱대는 모양이랄까. 그래서 그가 더 초라해 보이는 것처럼. 완벽하게 남아서 상상의 여지를 주지 않고 겉멋만 든 반짝이는 보석보다는 한 때 그 자리에 엄청난 보석이 있었다고 알려진 빈 왕관이 더 기억에 남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콜로세움으로 가는 길
Stadium에서 조금만 내려 오면 포로 로마노의 끝자락이다. 여기서 메인 광장까지는 약간의 비탈진 경사이고 중간 중간 포룸의 유적이 있긴 하지만 그 거대한 규모의 아치 돔 일부만 남은 막센티우스 콘스탄티우스 회당 유적이외에는 사실 눈길을 끄는 유적은 별로 없다. 이 막센티우스 회당은 포로 로마노에 있던 건물 중에 가장 큰 크기라고 하는데 남아 있는 아치 크기만 봐도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큼의 규모를 보여 주기는 한다.
이제 콜로세움으로 넘어가야 할 시간인데 이미 시간은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그다지 배고품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마음은 조금 초초해졌다. 왜냐하면 이미 콜로세움의 입장 시간을 놓쳤기 때문에 지금 콜로세움에 간다고 하더라도 입장이 될지 안될지 여전히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여기까지 왔는데 콜로세움을 못 들어가 본다면 무슨 낭패일까.
포로 로마노의 북서쪽 끝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이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 것처럼 포로 로마노의 남동쪽 끝에는 티투스 개선문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티투스 황제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도와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장본인이다. 이 개선문은 그가 죽은 후 후임 황제가 된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건설되었는데 개선문은 말 그대로 어떤 전쟁에 대한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작품이므로 이 개선문은 그가 유대인 반란을 진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새워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개선문에 새겨진 부조는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교에 관한 내용이 많다고 하며 무작정 크기로 승부하거나 투박하기 보다는 균형이 잘 잡힌 모습 때문에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티투스 황제는 제위에 오른지 불과 2년만에 열병으로 죽게 되지만 그가 통치하던 시절에는 베수비오스 화산이 폭발하여 폼페이가 묻히는 사건이 있었고,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건설이 시작되었던 콜로세움의 건설을 마무리 해서 준공 기념 축하 행사도 열었던 파란만장했던 굵고 짧은 시절을 보낸 사람이다.
포로 로마노에서 나와 콜로세움으로 가다 보면 콜로세움 입구 즈음에 또 다른 개선문을 만나게 되는데 이건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바로 그 황제이다. 그가 황제로 등극했을 때 이미 로마 제국은 동/서 제국으로 거의 분리가 된 상태였고 그가 비록 사두 정치의 다른 황제를 모두 제거하고 단독 통치 시대를 열었다고 해도 결정적으로 수도를 콘스탄티노플, 지금의 이스탄불로 옮겨 가는 바람에 로마는 사실상 버림 받았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 와중에 로마 근교에서 자신의 정적을 없앤 전투에 승리하고 나서 건축된 개선문이 바로 이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다. 이미 당시에도 고대 로마의 예술 정신은 다 옛날 이야기가 되어 이 개선문을 만들 때만 해도 이를 장식할 부조등을 제대로 만들 예술가들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 저기 남아 있던 유적들에서 떼어온 것들로 장식을 해서 통일성도 없고 그냥 규모만 키운 속빈 강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속사정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콜로세움으로 가는 길에 멀찌감치 바라만 보고 가까히 다가가 자세히 살펴 보지는 않았다. 콜로세움 입장권 문제도 있어서 거기에 더 신경이 쓰인 점도 있었지만...
고대 로마의 상징이자, 영광과 치욕의 기록인 콜로세움
일찌감치 예약했던 입장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들고 있는 입장권으로는 입장이 불가능했지만 다른 쪽 입구의 친절한 안내원이 설명해 준 것처럼 일단 콜로세움 입장권을 파는 박스 오피스로 갔다. 일반 입장권을 사려는 긴 줄이 있었지만 일단 박스 오피스 앞에 있는 안내원에서 사정을 이야기 하고 9번(아니 10번이었나) 창구로 가라고 들었다 이야기를 하니 그 옆에 아무도 줄 서 있지 않은 창구로 안내해 주었다. 다시 한번 들은 이야기를 창구 안 직원에게 이야기 하니 특별한 질문 없이 10분 후 입장인 표로 다시 발급해 주었다. 얼핏 기억에 수수료 몇 유로를 더 냈던 걸로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 이제 콜로세움으로 들어 갈 수 있다!!!
콜로세움의 공식 이름은 플라비우스 경기장이다. 이 건물을 짓기 시작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가문 이름이 플라비우스이기 때문이다. 시작은 그가 했지만 완공은 보지 못했고 그 아들인 티투스 황제 시절에 완공이 되었다. 놀라운 건 이 거대한 건축물을 불과 8년만에 다 지었다는 것이다. 5만에서 8만명까지도 입장할 수 있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인데 상암 월드컵 경기장의 수용 인원이 6만 6천석인걸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인 걸 알 수 있다. 상암 경기장을 짓는데 최신 공사 중장비를 이용해 3년이 걸렸으니 2000년전 순전히 사람들의 노동력으로, 물론 일부 목제 장비들이 있기는 했겠지만 이 커다란 건축물을 8년만에 지었다는 건 엄청난 기술력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공식적인 이름이 있음에도 모두에게 콜로세움으로 알려진 이유는 근처에 네로 황제의 거대한 동상인 콜로서스(colossus)가 있었기 때문이란다. 사실 플라비우스 경기장이라는 공식 이름보다는 콜로세움이 훨씬 어울리기는 한다.
콜로세움의 입장은 일단 금속 탐지기와 가방 검사를 포함한 보안 검사를 해야 한다. 그리고 계속 앞으로 나가면 경기장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는 곳이 나타난다. 여기에 서면 마치 커다란 축구장 한켠에 선 듯한 느낌이 들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면 거대한 콜로세움의 관중석이 나를 감싸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앞에 서 보면 밖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콜로세움의 크기를 조금 더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관람 동선이 표시된 방향을 따라 이동하면 2층/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만나게 된다. 계단을 올라가면 관람석 아래 내부 공간에 다다르며 현대의 일반 경기장 구조물처럼 그 내부에서 전체를 한바퀴 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입구가 있어 관람석 자리로 나가 볼 수 있다. 내부 공간을 따라 걷다보면 그 부분 중간 중간에 옛 콜로세움의 여러 모형, 건축할 때 사용한 도구들, 그리고 여러 콜로세움 역사에 대한 전시실을 볼 수 있다.
완공을 기념하는 개막식 때는 야생 동물 9000마리 이상이 희생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화려하고 거대한 오락 공간이었다. 그 이후로 523년까지 동물 사냥 경기가 있었다니까 상당히 오랫동안 로마 시민들에게 봉사한 건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서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중세를 지나는 동안 이 콜로세움은 이제 전혀 다른 용도로 로마 시민들에게 봉사를 시작한다. 바로 아주 아주 풍부한 건축 자재 창고로서 말이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지을 때는 필요한 건축 자재를 아애 대놓고 이 콜로세움에서 조달했다고 하니 어떤 상황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이렇게 좋은 자재상이 없을 것 같기는 하다.
내부에서 중간 중간 관람석쪽으로 나갈 수 있는 입구들이 있어 바깥으로 나가 보면 콜로세움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된다. 당장이라도 화려하게 싸우고 있는 검투사들에게 환호하는 로마 시민들의 환호성이 들릴 것만 같다. 관람석 부분도 내부와 마찬가지로 전체 콜로세움을 한바퀴 쭉 돌 수 있도록 연결되어 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중간쯤 부분에 사람들이 나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말 이 넓은 공간에이 사람들로 가득차서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검투사들의 경쟁을 보면서 환호를 지른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장황한 장면이었을까 상상해 본다. 지금도 상암 경기장에서 국가 대표 축구 경기가 열릴 때 그 안에 모인 사람들이 다 함께 "대~한.민.국" 하고 외치는 모습만 보아도 웅장함을 느끼는데 말이다.
콜로세움 안을 걷고 있다 보면 내가 지금 만지고 있는 이 조각 조각들이 무려 2000년 전에 로마 사람들에 의해서 실제로 하나씩 쌓아졌다는 것이 쉽게 믿겨지지가 않는다. 대부분의 미술관, 박물관에서 보게 되는 다른 여러 유적들은 나와는 몇걸음 떨어서 유리 보호관 안에 있거나 직접 보더라도 만질 수 없게 보호 펜스로 보호되어 있다. 포로 로마노에서도 예전 유적들은 몇걸음 건너에서 바라보며 설명 안내판을 보는 것이 전부이다. 그나마 예외라면 폼페이 유적이랄까. 하지만 그건 그냥 도시의 건물과 골목 사이를 평면으로 돌아다니는 관람이다. 그런 면에서 콜로세움은 그 건물 안에 직접 들어가 3차원의 공간을 직접 손으로 만지면서 다닐 수 있다. 다른 곳들은 보면서 상상으로 채워야 하지만 콜로세움만은 그 상상 위에 나를 함께 그려 넣을 수 있다.
로마라고 하면 누구나 이 콜로세움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나도 이번 여행을 시작하기 전 늘 머리 속에 떠오르던 랜드마크는 성 베드로 성당이 아니라 콜로세움이었다. 그런데 콜로세움이 그런 강력한 인상으로 남는 건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로마 제국이 가장 강력했을 때 탄생해서 수백년 동안이나 로마 시민들의 오락 장소로 그 영광의 중심에 우뚝 서 있을 때는 그 완벽을 자랑했을터이다. 게다가 다른 원형 경기장들은 보통 도시 외곽에 위치하고 있지만 콜로세움만은 도시 한복판, 그것도 로마 제국의 중심지인 포로 로마노 바로 곁에 위치하고 있다. 구지 멀리 찾아가지 않더라도 늘 일상과 함께 있는 건물이라는 뜻이 된다.
그렇게 완벽했던 콜로세움도 결국엔 로마 제국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한다. 그래서 더 마음이 쓰인다. 과거의 영광처럼 지금도 완벽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면 더 멋있었을까? 오히려 시간의 세월을 지나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버려 비스듬해진 불균형이 묘하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물은 이 콜로세움이 유일한 것 같다.
콜로세움에서 나와 그 앞에서 가족들이 다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번 여행동안 가족들이 다 함께 찍은 사진은 얼마 되지 않는데 이 콜로세움 앞에서 함께 찍은 사진은 구도도 좋았고 다들 표정도 좋아서 지금은 나도, 그리고 와이프도 핸드폰 배경 화면으로 사용하고 있다. 바쁘게 시간에 쫓겨 들어가 후다닥 관람하고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장소이지만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관람"이 아니 "경험"을 했다는 점 때문에 좀 더 기억에 남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잔혹한 일들이 많이 있어 누군가에게는 아픔의 장소이긴 하겠지만 지금은 스스로도 상처를 가지게 된 모습 때문에 말이다.
아침부터 저녁 시간까지 고대 로마의 다운 타운, 시내 한복판을 내내 걸어 다녔다. 생각해 보니 점심도 거르다시피 했고 가방에 조금 챙겨 두었던 과자들로 허기를 달랬지만 그 긴 여정을 걷는 동안 별로 피곤하다거나 배고프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긴장과 흥분이 끝나고 나면 함께 찾아 오기 마련이다. 콜로세움에서 나와 호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너무 배가 고프다고 느껴졌다. 큰 아이와 함께 Google Maps에서 주위에 괜찮은 식당을 찾기 시작했는데 큰 아이가 바로 근처에 리뷰가 굉장이 좋은 전통 이탈리아 식당을 하나 찾았다. 낯선 곳에서 맛있는 식당을 찾으려면 일단 골목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던가. 이 식당도 큰 길가가 아닌 골목 안으로 들어가야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식당 이름은 La Nuova Piazzetta. Google Maps에 19,000개의 리뷰가 달려 있는데 이들의 평점이 무려 4.8.
다수가 옳다고 하면 옳은거라고 했다. 평범한 seafood pasta를 시켰는데도 그 양도 푸짐했고 가격도 참 착했다. 얼마나 좋았는지 마지막날 로마를 떠나기 전 다시 한번 방문했다. 지금까지 이탈리아 와서 들렸던 식당 중에는 감히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고 다시 한번 또 가 보고 싶은 식당이다. 이번엔 순전히 맛 때문에 로마에 다시 가 보고 싶은 이유 하나 추가.
이제 이탈리아/로마 여행도 절반을 넘어섰고 꼭 가보고 싶었던 곳들은 일단 소화를 해 냈다. 앞으로 로마에서 지낼 수 있는 날은 3일이 남았고 내일 모레는 크리스마스다. 나머지 날들은 너무 서두르지 않고 조금 더 여유롭게 남은 날들을 즐기기로 했다. 내일 아침에도 난 로마에서 일어날 참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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