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2월 24일 일요일. 크리스마스 이브이자 일요일이다.
일단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했을 때 방문하고 싶었던 중요한 장소들은 일단 다 한번씩 방문했다. 남은 장소들은 가서 반나절 이상 몇시간씩 보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가벼운 장소로 선정해 두었다. 아직 며칠 로마에 머무를 시간이 더 있는데도 부지런히 중요 장소들을 빨리 빨리 다녔던 이유는 내일이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는 놀이 동산 같은 곳을 제외하고는 많은 관광지가 크리스마스는 휴관한다. 이탈리아도 비슷했고 그래서 오늘 내일은 주로 입장하지 않아도 되는, 명소 중심으로 스케줄을 짠 것이다.
아침에 맨 처음 방문해야 하는 장소를 제외하고는 따로 예약을 하지 않았다. 첫 방문 장소의 예약 시간은 11시. 그렇게 모처럼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하고 차근차근 준비했다.
오늘은 교통비 무료??
오늘 가는 첫번째 방문지는 보르게세 미술관. 걸어 갈 수는 없는 거리이고 당연히 대중 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Google Maps에서 찾아 보니 Roma Termini 앞에서 버스를 타면 바로 미술관 입구까지 갈 수 있었다. 그래서 가족들과 함께 호텔을 나서 Roma Termini 방향으로 걸어 가면서 전에 버스 티켓을 샀던 그 상점으로 향했다. 어, 그런데 그 상점이 닫혀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라 오늘은 열지 않는건가라고 생각하고 다른 상점에서 구하면 되겠지하고 계속 Roma Termini 방향으로 움직였다. 가는 길이 멀지도 않지만 가깝지도 않은 거리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아무리 둘러 봐도 버스 티켓을 파는 곳이 안 보였다. 결국 Roma Temini 앞까지 다 와서 그 앞의 노점상에서 물어 봤다. 어디서 티켓을 살 수 있냐고. 그랬더니 돌아 오는 대답. 오늘은 무료야....
왜???
아니 진짜 왜? 그 대답을 들었을 때 정말 머리 속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다 못해 없다는 말이나 안 판다는 말을 돌려 이야기 하는 건 아닐까라는 추측(?)까지 해 보았다. 자, 이럴 때는 구글의 도움이 필요하다. 얼마간의 검색 후에 답을 얻었다. 오늘은 대중 교통 무료.
12월에 지정된 3일은 대중 교통이 무료라고 설명된 페이지를 찾았다. 문제는 거기에 어디도 "왜"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리고 한가지 더 알게 된 사실은 내일, 25일은 무료가 아니지만 운행 시간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오전 9시부터 1시까지, 그리고 오후 4시 30분부터 저녁 9시까지만 운행한다는 것이다. 또 다시 "왜"???
이유는 아직 찾지 못한 상태로 일단 Roma Termini 앞의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아직도 무료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저 멀리서 타야 할 버스가 들어 오는 것이 보였다. 버스가 정류장에 서자마자 운전사에게 오늘 버스비가 무료인지 물어 보니 그렇다고 타란다. 훌쩍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고 보니 뒤따라 타는 사람들도 그냥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는 것이다. 버스가 움직이고 나서 뒷자리에 앉은 분이 계셔서 물어 보았다. 왜 오늘 무료인가요? 그랬더니 그 분이 설명해 주기를 크리스마스 휴일 쇼핑 하라고 무료란다. 말하자면 소비를 진작시켜 경제가 좀 더 잘 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당근 정책이라고 한다. 정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로마 사는 분의 설명이 그랬다.
아하... 하고 그 이유를 깨달았지만 동시에 깨달은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버스를 반대로 탔다는 것이다....
버스 정류장, 특히 Roma Termini 같은 대형 버스 정류장의 경우 버스는 양방향으로 다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어버버 하는 사이에 해당 노선 버스가 들어 오는 것을 보고 냅다 먼저 탔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3 정거장만 가고 나서 이걸 깨달았다는 것이다. 급하게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길 건너 반대편 버스 정류장으로 갔고 10여분을 기다리니 타야 할 방향의 버스가 도착했다. 오늘 하루의 에피소드...
보르게세 미술관 (Borghese Gallery and Museum)
로마로 출발하기 전 계획을 짤 때 어디 어디를 가야 할지 살펴 보기 위해 Google Maps에서 로마 지도를 화면에 띄웠더랬다. 지도 위에서 이리 저리 옮겨 보기도, 줌인/줌아웃하기도 하면서 가고 싶은 곳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가게 된다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 메트로 지하철이 있으니 어떻게 타야 하는지 등등을 찾아 보고 있던 중에 아까부터 자꾸 문에 띄이는 지도 위 커다란 녹색 부분이 있었다. 보통 지도 위 녹색 부분은 공원이나 녹지를 말하는데 로마라는 도시 규모를 생각해 봐도 생각보다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줌인해서 들어가 보니 Villa Borghese라는 이름의 공원이었다.
미리 미리 알아 보고 계획하는 성격에 가보고자 하는 장소에 대한 자료를 미리 찾아 보는 편인데 이 경우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다가 단단히 오해를 한 경우가 되었다. 이건 순전히 영어와 이탈리아어의 다르지만 비슷한 내용때문이다.... 라고 핑게를 대어 본다. 묵고 있는 호텔 앞의 거리 이름은 Via Nazionale인데 왠지 영어식으로만 봐서는 독일 나치 (Nazi) 연상되는데 Nazionale는 영어로 National에 해당한다. 이탈리아 이름 중 Giovanni는 영어 John에, Pietro는 Peter에 해당한다. 이렇게 살짝 살짝 비슷하면서도 다른 표현 때문에 처음 Borghese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머리 속에 떠올린 한사람이 "체사레 보르자"였다. 교황의 아들로 교황청 군대를 이끌고 교황령을 확립했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모델이었던 이 사람이라면 로마 한복판에 저만큼 큰 대지에 저택을 지을 수 있지 않았을까. Borghese와 "보르자" 왠지 이렇게 읽힐 수도 있을것만 같았다.
땡! 이건 완전 땡! 땡! 땡!
예전에 누군가 이탈리아말은 읽기가 아주 쉽다고 했다. 쓰인 그대로 읽으면 된다는 것이다. 영어로는 Rome이지만 이탈리아어로는 Roma. 영어로 Naples, Florence이지만 이탈리어어로는 Napoli, Firenze. 같은 식으로 Borghese는 "보르게세"라고 읽으면 된다. "보르자"와는 전혀 상관없다.
1600년 당시 스치피오네 카파렐리 보르게세 (Scipione Caffarelli Borghese) 라는 추기경이 있었는데 그가 (혹은 그의 가문이) 수집한 작품을 모아 전시한 곳이 이곳 보르게세 미술관이 되었다. 참고하던 Rick Stevens의 Best of Italy에도 로마 여행의 highlight 부분에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방문 예약은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조금 늦게 예매를 시작했는지 12월 초에 예매를 하려 했더니 비어 있는 시간이 없었던 것이었다. 당연히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문을 닫으니 방문이 불가능했고 남은 날짜는 오늘 24일, 혹은 마지막날 26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거의 포기하고 방문할 수 있는 다른 곳들을 찾아 보다가 혹시나 해서 떠나기 2-3일 전에 다시 한번 홈페이지에 들어 갔더니 취소표가 생겨서 그랬는지 24일 오전 11시가 가능했다. 어렵다면 어렵게 스케쥴에 끼워 넣을 수 있었던 미술관이다.
버스를 잘못탄 이유도 있어서 예약 시간 11시보다는 10분쯤 늦게 도착했다. 미술관은 공원 안쪽 도보로 5분쯤 거리에 있어 금방 찾아 갈 수 있었다. 원래 별장 건물이었던 탓인지 1층 부분이 거의 일반 건물의 2층 건물 높이로 높게 솟아 있었고 건물 정문으로 보이는 곳까지 나즈막한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부지런히 계단을 올라 정문 쪽으로 다가가니 미술관 관리인이 여기가 입구가 아니라 계단 밑 입구로 들어가라고 안내해 준다. 계단 옆으로 지하로 들어 가는 다른 계단이 있었는데 지하 전체가 미술관 입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우선 매표소는 두 종류의 창구가 있었는데 당일 현장 입장권을 사는 줄과 미리 예약을 한 경우 입장권으로 교환하는 창구가 있었다. 미리 예매를 했으니 거기서 입장권으로 바꾸고 나니 뒷편으로 가서 가져온 가방과 외투를 맡기라고 안내해 주었다. 이렇게 미술품들이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전시된 경우 등에 맨 백팩 가방등에 의해 방향을 틀다가 건드려서 부수어 버리는 일이 생길 수 있는데다가 아마도 어느 미치광이가 망치라도 들고 들어올까봐 방지하는 의미이기도 한 것 같다. 이미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서 "피에타" 조각상이 한번 당한 적이 있으니 미리 조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가방/옷가지를 맡기는 곳은 마치 세탁소처럼 훅이 달린 레일이 데스크 뒷편으로 있어 가방/옷가지를 쇼핑백 같은 곳에 담아 이 훅에 걸고 해당 번호표를 건네 주었다. 그 사이 레일이 움직이며 안쪽 보관소로 짐을 이동해 갔다. 영락없이 세탁소였다.
건물 자체가 사무 공간이었던 우피치 미술관이나 교황의 궁전등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바꾼 바티칸 박물관과 비교해 보면 보르게세 미술관은 소박한 편이다. 원래 사람이 거주하던 별장 건물이었다고 하니 처음부터 미술관 같은 것을 고려하고 지은 건물은 아닌 셈이다. 매표소와 짐을 맡기는 곳의 반대쪽인 제일 안쪽에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새로 받은 입장권에는 입장 시간이 적혀 있었는데 입구에서 안내하는 사람이 관람 시간은 2시간이라고 설명해 준다. 너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시간 별로 입장 하는 사람 수를 제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리 예매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현장에서 바로 입장권을 살 수도 있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모이면 바로 입장할 수 있는 시간대의 표를 구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이렇게 시간에 맞게 사람들을 입장 시키기 때문에 입장권을 확인하고는 그 시간 대에 입장한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색깔 스티커를 나누어 준다. 이걸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두면 된다.
지하 입구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 가면 바로 1층으로 올라 가는 계단을 만나게 된다. 밖에서 보았을 때 약 3층 정도의 높이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중에 2개층이 전시실로 되어 있었다..... (라고 기억한다. 이젠 종종 이런 것들이 가물가물하다....)
첫번째 전시실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이하는 것이 "페르세포네의 납치" (Rape of Proserpine) 이다. 인터넷에서 보르게세 미술관을 검색하면 제일 먼저 뜨는 미술관 대표 조각품이다. 영어로는 조금 불편한 단어가 사용되긴 했지만 여기서는 그런 뜻은 아니다. 작가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 로마는 이 사람의 거대한 스케치북이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부터 이름이 알려진 작은 성당까지 그의 작품이 없는 곳이 없다. 비단 조각품 뿐 만이 아니라 많은 성당 건축물을 새로 설계하거나 기존의 건축물을 새로 디자인한 곳도 많았다.
"페르세포네의 납치"는 그가 불과 23세일 때 완성한 그의 초기 작품으로 지하세계 신인 하데스가 제우스와 데메테르의 딸로 꽃과 식물의 여신인 페르세포네를 납치해 지하 세계로 끌고 가려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사진에서는 방향 때문에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하데스의 손이 페르세포네의 허벅지를 움켜진 부분이 정말 살아 있는 사람의 허벅지를 잡은 것처럼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등 디테일이 살아 있는 조각상으로 유명하다.
마치 이건 맛보기라는 듯한 느낌으로 전시실은 작은 방들이 주변을 둘러가며 서로 연결되어 여러 작가들의 그림, 조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라파엘로의 여러 명화들, 베르니니의 또 다른 다비드 상, 아폴로와 다프네 상 같은 조각상들은 또 다른 느낌을 전달해 준다. 우피치 미술관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이런 명화/조각들을 감상할 때는 초반 30분은 주의깊게 보지만 그 다음부터는 좀 설렁설렁 보게 된다. 그러다가 정작 명화/조각들 옆에 붙은 작가의 이름을 보고는 혹시라도 아는 이름이라면 아하! 그러며 좀 더 자세히 보게 된다. 미술사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냥 일반 관광객이라면 어쩔 수 없는 리액션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일주일 내내 유명하다면 유명한 명화들을 지겹게 보고 난 후라 결국에 그 그림이 그 그림처럼 보이고 그 앞에서 차분히 감상하기 보다는 숙제 하는 기분으로 쓰윽 지나가는 수준이 된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 보면 이젠 더 서두를 일도 없는데 좀 더 차분히 감상할 걸 이란 후회가 조금 든다. 특히 업로드 하기 위해서 찍은 사진들을 다시 살펴 보면서 저렇게 멋진 그림/조각들이 있었네라는 것들이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명화보다는 조각상이 더 끌리는 편이다. 그림은 평면적이고 조각상은 입체적이라는 것도 있겠지만 명화와는 다르게 조각상은 질감을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앞선 "페르세포네의 납치"라든가 사진은 찍지 못한 "아폴로와 다프네" 같은 조각들은 역동성도 느낄 수 있다.
우피치 미술관과 자꾸 비교하게 되지만, 보르게세 미술관은 딱 적당한 크기라는 생각이 든다. 2시간이라는 시간 제약도 처음엔 짧지 않나 싶었지만 부지런히 다닌 것도 아니지만 여유롭게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고 맘에 드는 작품 앞에서는 잠시나마 오래 서서 볼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2개의 층에 걸친 전시실을 다 보고 나면 처음 올라온 입구쪽으로 다시 내려가게 된다. 지하층까지 내려오면 처음 들어 왔던 입구를 만나게 되는데 거기에서 좌측으로 기념품/책을 파는 가게가 있어 나갈 때는 그쪽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주고 싶다는 간단한 기념품을 고르는 동안 가방 보관소에 돌아가 번호표를 주고 맡겨 놓은 가방과 외투를 받아 왔다.
보르게세 미술관을 나오고 나면 그 앞으로 보르게세 공원(Villa Borghese)이 펼쳐져 있다. Villa는 원래 집을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원래 보르게세 저택이 있던 이 공원 자체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 영어로 찾으면 Villa Borghese Garden이라고 뜬다. 지도에서 본 바와 같이 바티칸 시티 크기의 공원이라 시민의 숲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날씨가 조금 더 포근하고 근처에 찾을 수 있는 식당이 있었다면 피크닉 나왔다고 생각하고 둘러 보았을텐데 그러기엔 그날 날씨는 오전에 좀 쌀쌀한 편이었다. 그래서 발길을 돌려 다음 목적지, 판테온으로 이동해 근처에서 점심을 해결 하기로 했다.
길가에서 만나게 되는 유적들
판테온 자체가 큰 길가가 아니라 골목 골목 안 쪽에 있어 바로 앞까지 가는 버스 노선은 없다. Google Maps로 검색해 보면 어디까지는 버스로 가고 거기서부터 도보로 움직이라고 알려 준다. 우선 버스로 키치 궁 (Palazzo Chigi)까지 이동한 다음 건물 사이의 좁을 길로 들어섰다.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살짝 배가 고파져와서 판테온으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적당한 식당이 있으면 거기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키치 궁 방향으로 걷다가 뜻밖의 원기둥을 발견했다. 이걸 보자마자 내가 떠올린 건 "트라야누스 원기둥"이었다. 이건 역시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의 영향이 크다. 트라야누스 황제에 대한 내용을 다루면서 다키아 전쟁을 기술하는데 그 기술의 방법으로 "트라야누스 원기둥"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원기둥에 바닥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빙글빙글 돌아가며 두루마기처럼 전쟁의 내역을 조각해 놓았다. 그래서 시오노 나나미는 그 조각들을 하나 하나 보여 주며 다키아 전쟁이 어떻게 전개 되었는지 설명했다. 그 설명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그랬는지 이 원기둥을 보았을 때 이게 당연히 "트라야누스 원기둥"인줄 알았다. 게다가 원기둥에 여러 조각을 올려다 보며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땡!
또 틀렸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일식당에서 "트라야누스 원기둥"을 검색했을 때 "트라야누스 원기둥"은 포로 로마노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고 이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기둥"이었다. 비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게르만족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트라야누스 원기둥"의 내용과는 달리 그의 게르만족 전쟁 내용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의 일상 로마인들의 생활들과 그가 로마 시민들에게서 받은 존경이 장면들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이 원기둥이 여기 있는지 몰랐던 무지에서 온 실수 하나.
원기둥을 뒤에 남겨 두고 옆 골목으로 들어가니 이번엔 뜻하지 않은 오벨리스크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갑자기 이집트 상형 문자가 새겨진 오벨리스크를 보니 어리둥절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건 궁금해서 검색부터 해 보았다. 뜬금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 오벨리스크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집트에서 직접 가져온 오벨리스크였다. 로마에는 이런 오리지널 이집트 오벨리스크가 13개 있다는데 대부분 로마 제국이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던 시절 옮겨져 왔다고 한다. 고대 로마 유적을 보러 왔다가 뜻하지 않게 고대 이집트 유적도 보게 되었다.
판테온 (Pantheon)
콜로세움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로마의 유명한 관광지라고 하면 한번씩 이름을 올리게 되는 곳이 이 판테온이다. 판테온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완벽한 돔이다. 아마 외부 건물 사진만 보여 준다면 이게 어딜까 잘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건물 자체도 엄청난 유적이다. 기원전 27년 아그리파가 세번째 집정관에 올랐을 때 처음 판테온을 지었는데 서기 80년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해서 소실 되었다고 한다. 이 때가 티투스 황제 시절이다. 바로 이전 해에 폼페이를 묻히게 만든 베수비오스 화산 폭발도 있었으니 이쯤 되면 티투스 황제가 불쌍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그 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서기 125년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는데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붙힌 것이 아니라 원래 건물에 있던 명문(M.AGRIPPA.L.F.COS.TERTIVM.FECIT; Marcus Agrippa, Luciii filius, consul tertium fecit; "루시우스의 아들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세번째 집정관 임기에 만들었다" 라는 뜻)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고 한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재건한 건물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아그리파가 만들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밀하게 말하면 맞는 말도 아니다.
이런 위치에 있는 유적지이지만 정말 골목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좁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갑자기 넒은 광장과 함께 판테온이 나타난다. 이 광장에 오벨리스크가 하나 또 있는데 이것도 람세스 2세때 만들어져 로마로 옮겨진 진품 이집트 오벨리스크이다. 판테온을 외부에서만 보면 정문 부분은 그리스 시대 신전 같은 모습이고 외벽 때문에 그 유명한 돔의 모습은 바로 보이지 않는다. 입장을 하기 위해서는 입장권을 사야 하는데 매표소 앞에 긴 줄이 보였다. 혹시나 입장하지 못하는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매표소와는 따로 그 옆에 kiosk가 세개쯤 따로 있었고 거기에 줄을 섰더니 생각보다는 금방 입장권을 살 수 있었다. 큰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아닌 단일 건물 하나 뿐이니 사람들이 금방 금방 입장하고 퇴장하는지라 크게 문제는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다만 인터넷에서 미리 검색해 보았을 때는 여름 성수기 때는 입장에만 한시간 넘게 기다릴 수도 있다고 했다.
판테온은 딱 이 장면 하나를 보기 위해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다. 실내에서 바라보는 엄청난 크기의 돔과 그리고 그 꼭대기에 위치한 구멍. Oculus라고 불리우는 이 구멍은 라틴어로 눈이라는 뜻이고 채광을 위한, 혹은 로마식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태우면서 생기는 연기를 빼내기 위한 구멍이라고 생각되는데 이 Oculus 때문에 돔이 미적인 아름다움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만일 이 구멍이 없이 전체가 막혀 있는 돔 모양이었다면 왠지 답답한 느낌이 들었을 것 같다. 하지만 시원스럽게 뚫린 구멍 하나로 답답함을 훌쩍 날려 버린 느낌이다. 공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는데 돔이라는 구조 자체가 아치 형태로 모든 중량을 아래쪽 기둥이 감당해 내지만 또한 돔의 맨 꼭대기 부분도 각 아치 형태의 힘이 한 곳으로 모이는 위치가 되어 엄청난 압력을 받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원형 구멍을 만들면 이 원형이 또 다른 아치 형태가 되어 그 힘을 분산해 줄 수 있다. 즉, 아치 안에 다른 아치가 있는 구조인 셈이다.
고급 자동차로 유명한 롤스로이스의 전면 그릴 디자인이 이 판테온의 정면 열주 모양을 본 땄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장권을 받아 들자마자 안에 들어가는 것만 생각하는지라 판테온의 외부 열주 부분에 대해서는 잘 언급하지 않는 편이다. 나도 솔직히 외부 부분은 자세히 들어다 보지도 않았고 기억이 나는 부분이 있지도 않는다. 나도 바로 판테온 안으로 입장해 버렸다. 내부는 잘 알려지다시피 둥근 형태로 돔 부분은 상당히 높은 곳에서 시작하고 있다.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려다 보지 않는다면 내가 어떤 돔 아래 서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이다.
판테온, Pantheon은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말로 "모든 신을 위한 신전"이라는 뜻이다. 기록에 따르면 동그란 벽면을 따라 여러 로마신들, 신격화 된 황제들의 동상이 있었다고 하지만 중세를 거치는 동안 모두 없어지고 7세기 쯤에 가톨릭 성당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다보니 벽면 상단에 보면 동상들을 놓았을 법한 자리들이 그 주인을 잃은 채 여기 저기 보인다. 중세를 거치는 동안 다른 여러 로마 유적들이 약탈되고 다른 건물, 특히 성당 등을 짓기 위해 자재를 꺼내가 원형을 많이 잃었지만 일찌감치 성당으로 변해버린 탓에 오히려 원형이 잘 유지된 아이러니한 경우라고 한다. 물론 외벽을 장식하던 대리석, 외벽의 장식들은 약탈 당할 수 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반쪽만 남은 콜로세움과 비교해 보면 그래도 상황이 훨씬 낫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대에 들어서 판테온은 유명 인사들의 무덤으로 사용된다. 근대 이탈리아 통일 왕국을 이끈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를 포함 여러 왕족들과 드물게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의 무덤이 여기 있다. 라파엘로가 생전에 이 판테온이 가장 완벽한 예술품이라고 극찬을 하면서 이상향 작품으로 삼았는데 그래서 나중에 판테온에 묻히기를 바랬었다고 한다. 이 때는 이미 성당으로 변모한 상태이고 성당에 유명 인사들의 유해가 안치되는 것이 가능한 시대이긴 했다. 그래도 불과 사망 당시 37세에 불과했던 라파엘로가 판테온에 묻힐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교황인 레오 10세의 총애와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책임자까지 역임했던 그의 능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판테온에서 이 거장의 무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입구 정면에서 바라 보면 좌우로 유명 인사들의 무덤이 위치해 있고 바로 맞은편은 성당으로 꾸며져 있다. 미사를 위한 제대 등이 갖추어져 있고 그 앞으로 신자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들이 줄지어 위치해 있다. 지금도 성당으로 사용되어 미사가 진행 된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그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위치한 돔의 Oculus를 보고 있다거나 아니면 차분히 여러 무덤 장식들을 둘러 보고 있었다. 이렇게 성당이 한켠에 자리하고 있으니 판테온 내부에서는 다들 소근소근 귓속말을 하게 된다.
밖으로 다시 나오게 되면 잠시 잊고 있던 판테온 정면의 열주 모양에 감탄하게 되지만 그 뒤로 돌아 서게 되면 정말 평범한 건물 그 자체이다. 정면이 아닌 곳에서 본다면 이 평범한 건물이 무엇을 품고 있는지 관심도 없을 것 같은 모습이다. 진주도 투박하고 거친 조개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진주라는 보석을 찾는 건 그걸 받아든 사람의 안목에 달렸다.
트레비 분수
다음 장소는 트레비 분수. 판테온에서 트레비 분수로 옮겨 가는 것이 정석 관람 코스인가 보다. 건너편에 위치한 건물 모퉁이에 트레비 분수 방향이 적힌 안내판이 보였다. 그 화살표 방향을 따라, 그리고 Google Maps의 안내를 받아 또 다시 구불 구불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예전에 손 안에 네비게이터가 없던 시절엔 이걸 어떻게 찾아 다녔을까? 생각해 보면 그런 시절이 그리 오래 전은 아니었다. 미국 와서 처음 여행 갈 때면 먼저 들려야 할 장소가 AAA 사무실이었고 순전히 지도를 얻기 위함이었다. 2000년 중후반에 처음 $300 인가 그 이상인가를 주고 처음으로 Garmin의 Navigator를 샀을 때 신세계가 열렸다고 신기해 하던 때가 생각난다. 그런데 이젠 내 손 안에 Google Maps라니...
판테온과 마찬가지로 정말 이런 곳에 있다고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좁은 골목길에서 갑자기 확 트인 광장과 함께 트레비 분수가 짜잔 하고 나타난다. 로마에 오는 모든 관광객을 꼭 한번쯤 들린다는 트레비 분수. 그런데 그 앞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분수를 장식하고 있는 아름다운 조각상이라든가 뒷 배경의 건물과 잘 어우러진 전체적인 구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어떻게든 이 사람들을 뚫고 저 앞으로 나가 동전을 어께 너머로 던지는 것 밖에는 없는 것 같아 보였다. 행위가 목적을 집어 삼킨 예랄까. 아니다. 이미 여기서는 목적이 동전 던지기이지 분수가 멋진지 아닌지가 아니다.
도로에서 분수 앞까지는 마치 경기 관람장처럼 몇 단계의 계단 모양으로 생겼고 그 아래로 내려 가면 분수 바로 앞에 다다른다. 중간 중간 그 계단에 앉아 감상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분수를 바라 보는게 아니라 분수를 등지고 서 있다. 사람이 계속 몰려 드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 계단에 앉아 분수가 만들어내는 물 떨어지는 소리를 조용이 들으며 여유를 즐기면 좋으련만 결코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도 부지런히 자리를 잡고 아이들에게 동전을 하나씩 쥐어주고 어께 너머로 던지는 장면을 사진을 담으며 그렇게 숙제를 끝냈다. 숙제를 끝낸 사람들을 이제 숙제를 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밀려 나오기 마련이다.
길에서 분수 방향으로 바라 보면 전체가 엄청난 조각상들로 장식된 엄청난 장관이지만 조금만 옆으로 돌아 서거나 Google Maps 같은 걸로 aerial view로 보게 된다면 이 트레비 분수는 어떤 건물의 한쪽 면인 걸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Palazzo Poli라고 부르는데 이 건물에 분수를 만든 것이 아니라 트레비 분수가 완성된 이후 이 분수에 맞추어 기존 건물을 부수고 새로 건축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전체 건물은 주변의 다른 건물과 다르지 않은 그냥 평범한 건물이다. 분수가 조성된 앞면만 분수와 어울리도록 건축된 아주 희안한 건물인 셈이다.
나중에 사진을 정리하다가 뒤늦게 떠올린 것이 한가지가 있었다. 가짜 창문.
이 이야기는 워낙 유명해서 예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막상 트레비 분수에 갔을 때는 잊어 버리고 있었다. 화려해 보이는 이 분수의 배경이 되는 Palazzo Poli의 창문들 중에서 2층 맨 오른쪽 창문은 실제 창문이 아닌 가짜, 즉 그림이다. 위 사진에서는 잘 알아 볼 수가 없는데 구글에 "트레비 분수 창문"을 검색하면 가까이서 옆 창문과 비교한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얼마나 정교한지 누군가 이야기 해 주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알아채지 못할 정도이다. 그 때 가서 잘 봤어야 하는데.
스페인 계단 (Spanish Steps)
트레비 분수에 던져진 동전은 수거해서 자선 사업에 사용된다고 한다. 그래서 분수에 들어가거나 거기서 동전을 건져 내는 건 불법이라고 한다.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자선 사업에 쓰일 동전을 후원하고 나서 오늘의 마지막 장소로 옮겨 갔다.
로마 한복판에 스페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바로 옆에 스페인 대사관이 있기 때문이다. 트레비 분수에서 Google Maps를 보면서 스페인 계단을 찾아가고 있는데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 커다란 국기가 내 걸린 건물이 있었고 그 앞에는 무장한 경찰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이 건물이 스페인 대사관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보트 모양의 작은 분수가 있는 스페인 광장이 있고 거기에서 언덕 위로 스페인 계단이 펼쳐져 있다. 언덕 꼭대기에는 Trinita dei Monti라는 성당이 있다. 이 모든 세 부분이 잘 어울려져 하나의 장관을 만들어 낸다. 특히 언덕 위 성당은 계단 위 배경을 제대로 채워주고 있어 만일 이런 웅장한 건물이 없었더라면 정말 밋밋한 풍경이었을 것 같다.
스페인 계단은 그냥 단순한 장소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이렇게 모이는 건 순전히 영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영화도 아닌 "로마의 휴일", 그리고 거기에 더해진 오드리 햅번. 전체적인 세 부분, 광장, 계단, 그리고 언덕 위 성당까지 잘 어울어진 장소라 그 전에도 유명한 장소였겠지만 이 영화가 거기에 강력한 양념을 더한 셈이다. 그리고 한때 그 계단에 서서, 혹은 앉아서 오드리 햅번처럼 젤라또를 먹는 것이 유행이었다. 지금은 유적 보호를 위해 금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로마의 휴일"에서 스페인 계단은 낭만의 장소였지만 최근에 본 두 영화에서는 망가지고 부서지는 수모를 겪는다. 하나는 "분노의 질주: 라이드 오어 다이, Fast X: Ride or Die". 여기서 폭탄이 설치된 거대한 강철공을 쫓아 가게 되는데 그 강철공이 이 계단의 꼭대기에서 아래로 구르며 맨 아래 광장에 있는 보트 모양의 분수를 박살 내는 것으로 나온다. 두번째 영화는 "미션 임파서블 7: Mission: Impossible - Dead Reckoning Part One". 여기서도 주인공 이단 헌트와 그레이스가 도망치면서 역시나 자동차로 계단 꼭대기에서 광장까지 다 부수어 가며 내려 온다. 워낙 명소라 이 장소 말고도 여러 로마의 다른 장소들이 나오긴 하지만 계단이라는 위치 때문에 뭔가 부수며 내려오는 장면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 같다. 그냥 낭만적인 모습으로 돌려다오....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그런건지 생각보다 사람은 많지 않았고 살짝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서 더더욱 한가해져 갔다. 아이들은 여기 저기 돌아 다니며 자신들의 사진을 찍기 바빴고 나와 와이프는 계단에 걸터 앉아 휴식, 아니 조금의 여유로움을 찾고 있었다. 하루 종일 돌아 다녔음에도 피곤하기 보다는 여행 왔다는 기분 때문인지 살짝 들뜬 마음이 내내 들었고 오늘 하루도 좋은 곳을 많이 보고 듣고 느꼈음에 감사했다. 그런 면에서는 스페인 광장은 무언가를 구경하는 장소라기 보다는 쉼을 느끼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왜 오드리 햅번이 젤라또를 먹었는지 이해 하는 기분이랄까. 비단 젤라또가 아니더라도 커피 한잔이라도 한다면 하루의 마무리로써 참 좋을 것 같았다.
더 어두어지기 전에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지도에서 본 바로는 스페인 계단 꼭대기 Trinita dei Monti 성당 앞에 Metro 지하철이 있어 Roma Termini까지 갈 수 있다고 나와 있었다. 그래서 그 곳으로 향했는데 Metro로 내려가는 지하도 입구에 셔터가 내려와 있었다. 운행이 끝났다는 말인가? 내일 크리스마스에 운행 제한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혹 다른 입구가 있을까 싶어 여기 저기 둘러 보았지만 다른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옆에 좌판을 벌이고 있는 상인분에게 여쭈어 보았는데 이번엔 영어를 못 하셨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 하고 있던 차에 호텔까지의 거리를 보니 직선거리로 갈 수 있었지만 버스 노선이 없었고,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다른 방향으로 한참 가야 했는데 따져 보면 거기까기 걸어가서 버스를 타나, 그냥 곧게 뻗은 길로 걸어가나 10분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너무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 와이프도 아이들도 괜찮다고 해서 그냥 걸어 가기로 했다.
언덕길이 조금 있어서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비교적 차분한 로마의 밤거리를 거닐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게다가 가는 길에 마주한 Fontana del Tritone (트리톤 분수, Bernini 작품), Palazzo Barberini (바베리니 궁전, 지금은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로마의 휴일"에서는 "Ann" 공주의 대사관으로 나온다) 등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뜻하지 않게 마주한 장소들이었다. 로마는 어디를 가나 풍성한 무언가를 선물해 준다.
호텔로 돌아와 잠시 쉬면서 Google Maps에서 근처 식당을 찾았는데 마침 근처 식당 하나가 리뷰도 좋고 특히 한국 사람들 리뷰가 많은 이탈리아 식당이 하나 있었다. 식당 이름은 La Degusteria del Principe. 크리스마스 이브이기도 하니까 제대로 된 이탈리아 식당에 가기로 하고 거기에 갔었는데 조금 짜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은 장소였다. 특이하게 건물 반지하에 위치해서 처음에는 잘 찾을 수가 없었지만 내부는 깔끔하고 서버들도 참 친절했다.
이제 로마에서는 이틀이 더 남았다. 내일은 크리스마스라 많은 장소들이 문을 닫고 쉬는 날이라 계획을 잘 세워야 했다. 이틀 동안은 정말 하루 종일 걷게 되겠지만 그래도 묘하게 기대에 차게 된다.
자, 조금만 더 기운을 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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