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취업비자로 첫걸음을 내 디딘 날이 2004년 11월 8일.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 날이 큰 아이의 생일날과 같았기 때문이다.
San Francisco 공항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렌트카 센터로 갈 때 창밖으로 너무나 화창하던 그 California 날씨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때는 시간이 이렇게 훌쩍 지나 한 아이는 세 아이가 되고 그 화창한 날씨에서
화씨 100도를 넘나드는 Austin, TX에서 오늘 하루를 맞이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시간이 변해 버렸다.
난 어디서, 어쩌다가 그리고 어떻게 미국에 취업하고 16년 넘게 살고 있게 된걸까?
그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전에 우선 미국에 취업으로 오기 전 몇번 경험했던 미국 방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한달의 짧은 여행, 그리고 몇번의 출장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미국에 대해서 경험할 수 있었고
그 경험이 나중에 미국으로 오게 된 결정을 내리는데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처음 경험으로 미국 땅에 첫걸음을 내딛었을 때는 1990년 12월 대학교 1학년을 막 마치고 나서였다.
당시 막내 고모님께서 LA에 살고 계셨는데 나와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을 초대해 주셔서 우리 삼남매가
한달 정도의 미국 여행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부모님 동행 없이 딱 우리 삼남매만.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이 왜 그 때 우리만 미국에 보내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언제 시간이 되면 여쭈어 봐야겠다.
그 때는 여행 자율화 시대가 아니라 여권은 기본적으로 단수 여권 밖에 나오지 않았다. 특히 아직 병역미필이었던
나와 나 동생은 병무청에 허가 서류를 받느라 더 힘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나마도 그 땐 그 단수 여권을 받기 위해서는 소위 안보 교육이라는 것도 받아야 했다. 나는 학교가 포항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 교육 자체도 대구까지 나와서 받았던 기억이 난다. 교육 내용은 해외 나갔을 때 지켜야 할 에티켓과
북한 공작원이 관광객, 혹은 유학생들에게 어떻게 접근하는지에 대한 교육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여권을 받거나 해외에 나가기 위해서 뭐 이런 것까지 교육이 필요할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때는 그랬다. 그리고 그 교육장에서 저 멀리 학교 다른 과 교수님을 뵈었을 때는,
아 이건 어쩔 수 없는 거구나 라는 생각도 했었더랬다.
나와 남동생은 미필에 부모님 없이 20대 초반 남자 애들 둘과 초등학생이었던 여동생, 이렇게 아이들 셋만 여행한다고
여권 신청하고 미국 관광 비자 받는게 쉽지만은 않았을텐데 어떻게 큰 문제 없이 준비가 다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미국이란 곳에 처음 방문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나지 않는 90년 12월 초, 그 때는 인천 공항이 아직 없었을 때라 김포 국제 공항 2청사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미국가는 비행기는 아시아나 747 점보였는데 이것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당시 아시아나 항공의
첫 미주 취항이어서 대대적으로 선전을 했었는데다가 100석도 되지 않는 포항/서울간 비행기를 한두어번 타 본 나는
탑승구 앞에서 바라보는 747 점보 비행기의 위용에 떡하니 얼어 붙었던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물론 몇년 전 한국을 다시 방문하면서 마주한 A380에도 이제는 어, 크긴 크네 라는 감탄사로 바뀌긴 했지만
당시에는 그 크기에 압도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곧 그게 어 크네라는 감탄사의 시작에 불과했다는 건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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