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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옛 수필

어떤 낯섬

by 피터K 2021. 6. 18.

*!* 이 글은 1994년에서 97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내가 요즈음 늦잠을 잘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며칠 동안 무거운 짐을

옮기고 있기 때문이고 새로 옮겨 가는 실험실의 배치와 네트웍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짐만 옮기는 일이라면 아마도 

아무런 생각없이 몸만 부리면 될텐데 그 외에도 책상의 배치, 가구의

정렬, 그리고 가장 문제가 되었던 네트웍의 설치가 나를 너무나도 많이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며칠 내내 머리가 너무나 

아파서 타이레놀을 거의 매일 먹어야 했던 이유는 말이다. 


엘지에서 새로 우리 과가 사용할 건물을 지어 주었다. 처음에 외양만

볼 때에는 학교의 다른 여느 건물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꼈었지만 

막상 내부에 공사가 끝나서 들어와 보니 건물 가운데를 천장까지 비워 

채광 유리를 두고 그 주위로 회랑을 설치하여 마치 미술관과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내가 가진 첫 느낌은 참 멋있다였다. 실험실의 위치가 정해지고

마무리 공사가 거의 끝나서 12월 말쯤에 이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가구의 설정과 설치가 너무 늦어져서 지난 월요일부터

본격적인 이사가 시작되었다. 우린 언제 이사 할지는 몰라서 그 전부터

짐을 다 싸 놓고 있었기 때문에 한 2주 정도는 아무런 일도 못하고

단순한 일만 했던거 같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가 이제서야

짐을 다 옮기고 나서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났다.


공간이 저번에 쓰던 건물보다는 조금 더 넓어졌다. 일인당 차지 하는

넓이도 전에는 책상 두개에서 이제는 코너 책상을 포함해서 새개가

되었고 책장도 한 벽면을 따라 길게 늘어 놓아서 공간도 넉넉해졌다.

무엇보다도 기분을 새롭게 하는 것은 깨끗해진 환경과 새 가구, 그리고

어떤 환경의 변화인 것 같다. 전에 사용하던 실험실은 내가 석사를

들어 올 때부터 사용해서 내가 쓰던 자리는 거의 3년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고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침에 출근해서 하루 종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밤에 다시 기숙사로 향하는 단조로운 일과의

반복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빨리 이사를 했으면 하고 바랬던

이유는 이런 단조로움의 탈피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 이사를 와서 그런지 깨끗함과 신선함의 여유를 가지게

되긴 하였지만 난방이 잘 되지 않고 너무나 넓어진 공간 때문에 

어딘가 텅 비어 버린 모습이 군데 군데 눈에 띄이곤 한다. 

다른 것보다 난방이 되지 않아서 추위를 느끼는 것은 왠지 낯섬에

적응하지 못하도록 사람을 움추려 들게 만드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새로와 진다는 건 늘 최선의 모습만은 아닌 것 같다.

새로운 건물에 이사를 온 것에서 느끼는 이러한 적막함과 낯섬에 

비추어 누군가 사람을 새로 만나고 알게 되어야 한다는 모험은

늘 따뜻함 속에서만 자라온 사람에게 있어서는 견디기 힘든 일인지도

모르겠다. 새로 이사온 건물의 위치를 잘 알지 못해서 허둥 대던

모습에서 자유 자재로 가고 싶은 곳으로 향하던 과거의 향수가

문뜩 떠 오르는 것은 늘 변화를 바라지만 마음 속 깊은 곳 어디에선가는

변하지 않고 항상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알고 이해해 준 많은 친구들을 때론 잊혀져 가고 또 그들의

기억 속에서도 내가 아스라이 사라져 버리고 전혀 나를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만나게 될 때, 난 그 친구들의 따뜻했던 마음을 기억해 

낼 수 있을까? 어쩌면 그 기억과 추억을 통해 그 사람이 내게 얼마나

다정하고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되살려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텅 비어 버린 커다란 셀 안 쪽에서 모든게 새롭고 아직 그 비닐 조차

벗겨 버리지 않은 의자에 앉아 늘 꿈 꾸어 오던 새로운 환경의 새 실험실에서

문뜩 예전의 좁기만 하고 먼지 투성이던, 그렇지만 아늑하게 느껴지는

옛 실험실의 자리가 그리워지는 건 하느님이 내려 주신 사람의 

어떤 조화인지 잘 모르겠다. 

누군가를 새로 만나게 될 때 그리고 그에게서 새로움과 더불어 어떤

낯섬을 느끼게 될 때 난 어떤 이를 떠올리게 되고 어떤 추억을 되살리게

될까?

짧은 안부 전화와 함께 긴 이야기가 문뜩 그리워지는 어느 날 오후인거

같다. 내가 늘 그렇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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