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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옛 수필

Love Letter

by 피터K 2021. 6. 18.

*!* 이 글은 1994년에서 97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난 영화를 참 좋아하는 편이다. 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 환상에 빠져들기 마련이고 내가 겪어 보지 못한 어느 이상한

세상에 때론 주인공으로 그리고 때론 그 주인공 주위를 스쳐 지나 가는

한 엑스트라로 다른 인생을 잠시 살아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영화가 나를 그런 환상 속으로 초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보아온 많은 영화들 중에서 너무나 마음에 드는

한 영화를 만나게 될 때 난 마음을 그 안에 잠시 쉬게 할 수 있는

모양이다. 


Love Letter.

그동안 나의 마음을 아련하게 감싸 안아 주었던 영화가 없었기 때문일까?

뜻하지 않은 한편의 이 일본 영화가 어느새 싸늘하게 얼어 붙은

나의 마음을 살며시 데워 주었다.

화면 가득히 찬 설경에 주제 음악이 흐르는 동안 두 눈을 꼭 감고

평화로움에 잠겨 있는 여 주인공의 모습으로 부터 시작하는 이 영화는

두 사람의 뜻하지 않는 펜팔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진다.

사고로 죽은 남자를 잊지 못하여 그의 중학교 시절의 앨범에서 주소를

찾아 내어 편지를 쓴다. 주인공인 와타나베 히로꼬는 그 편지가 

천국으로 배달되기를 바라며 보낸 편지였다.

"후지이 이쯔끼씨, 잘 지내고 계시죠, 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뜻하지 않게 중학교 시절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여자에게 전달이 되고 만다. 와타나베 히로꼬가 적어온 앨범의

주소가 동명 이인인 다른 이의 주소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편지는 여자인 후지이 이쯔끼의 중학 동창생인

남자 후지이 이쯔끼에 대한 추억으로 옮겨 간다. 같은 이름 때문에

놀림을 당하던 일,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같이 도서 위원이 된 일들...

그리고 화면은 어린 시절 두 사람의 후지이 이쯔끼 모습으로 바뀐다.

무뚝뚝하고 건방지기까지 한 남자 후지이 이쯔끼. 그에게 한가지

독특한 점이 있다면 남들이 대출하지 않는 책에 자신의 대출 기록을

남기는 것이었다. 아무도 빌려 보지 않은 책의 대출 카드에 

이렇게 이름을 적는 것이었다. '후지이 이쯔끼'


와타나베 히로꼬는 여자 후지이 이쯔끼로부터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서서히 진실을 깨닫는다. 자신을 사랑하던 후지이 이쯔끼가

자신을 선택한 이유가 그 중학 동창 후지이 이쯔끼를 닮았기 

때문은 아닐까.. 

'그 사람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그랬어요. 저도 그 말을

믿었어요. 하지만... 첫눈에 반하는 데도 이유가 있나 봐요...

저 속았어요...'

남자 후지이 이쯔끼의 어머니 앞에서 와타나베 히로꼬는 그의 

진심을 알아 가게 되는 것이다.


그 무렵, 남자 동창 후지이 이쯔끼에 대한 추억을 모으던 여자 후지이

이쯔끼는 옛 학교의 도서관에 들리고 거기서 자신이 이름이 적힌

도서 카드를 찾는게 게임이 되어 버린 학생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추억으로 그녀는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빌린 책을

대신 반납해 달라던 후지이 이쯔끼의 모습을 떠 올린다.

와타나베 히로꼬는 그녀에게 마지막 편지를 전함으로써 그 모든

이야기를 마치게 된다. 

'추신 : 그 도서 카드에 적혀 있던 이름이 정말로 그이의 이름이었을까요?

그가 썼던 이름은 당신의 이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더 이상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 마지막은 내게 묘한 감동을 전해 주었고, 또 언젠가 이 영화를 보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감동을 전해 줄테니 말이다.

다만 상상에 맡겨 본다. 지금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더구나 말로써 그 사랑을 드러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그러나 때로 저미어 오는 그 아픔은 누가 알 수 있을까?

하얀 커튼이 바람에 흩날리는 그 창가에 기대어 말없이 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고 있던 그 어린 후지이 이쯔끼의 모습이 눈에 

어려 온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훌쩍 커 버린 어느 시절의 내 모습도

그 안에 갖히어 펄럭이는 하얀 커튼 뒤로 숨어 버릴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뜻하지 않은 어느 도서 카드를 받아 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후지이 이쯔끼의 마지막 모습이 내 여린 가슴의 한 풍경을 그리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나를 훔쳐 버린 마른 눈물의

의미는 가슴 깊숙히 낯선 책을 안고 있는 후지이 이쯔끼의 그 눈물의

의미와 같지나 않을까...


잠시 그 아름다움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 본다. 어린 시절 후지이

이쯔끼의 모습과 더불어 화면을 가득히 메우던 하얀 색조들의 아름다움을

떠올려 보기 위해서... 사랑이란 것은 어느새 나도 모르게 찾아와 작은

생채기를 남기며 잡을 여유도 주지 않고 그렇게 훌쩍 떠나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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