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994년에서 97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주중 속에 휴일이라는 핑게때문인지 오늘은 해야 할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후후.. 물론 이건 나만의 모습은 아니다. 느즈막하게
늦잠을 자고 2시 30분즈음에 실험실로 올라 왔지만 실험실엔
단지 한 후배만 있었을 뿐이고 그나마 도서관 간다는 말을 *정말?* 남기고는
곧 사라졌다.
휭하니 커다란 실험실에 혼자 남게 되었고 어쩐지 그 고독이 잠시나마
나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나도 사실은 공부나 일을 하려고 올라 온 것은 아니었다.
방에 올라 올 때 나의 손엔 작은 소설책 하나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처럼 편안히 책이나 읽어 보려던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이렇게 전공책이나 논문이 아닌 책을 읽어 본 것은 얼마만의 일일까?
불행이도(?) 어떤 멋진 사색집이라든가 이름있는 누군가의 수필집도
아니었다. 예전부터 책상 위를 굴러 다니던 아가사 크리스티의
'커튼'이란 추리 소설이었다. 실은 예전부터 읽어 보고 싶던
책이었지만 이번 휴일에 그래도 빨간날인데 하는 핑게로 집어 들게
된 책이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마지막 소설이기도 했고 회색 뇌 세포를
번뜩이는 엘큘 포와로가 죽는, 그래서 뉴욕 타임즈에 부고 기사가
났던 그런 소설이었다. 예전부터 추리 소설을 좋아 했던 나에게 있어선
적당한 오후의 평화였는지도 모르겠다.
헤이스팅스 대위의 독백체로 이어 지는 소설인 이 책을 한장 한장
넘겨 가고 있었다. 스타일 장에서 생기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거기서 일어나는 묘한 분위기와 등장 인물들의 고민, 고뇌,
여러 가지 감정의 변화....
하지만 그동안 아가사 크리스티의 책을 몇번 읽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다른 모든 소설도 그렇다는 인식이 나의 뇌리 속에 새겨져 있어서
그랬을까 순간 머리 속에 이런 생각이 훑고 지나 갔다.
잘 될꺼야, 저 사람들의 고민과 근심 거리는 모두 잘 풀릴꺼야...
암 그렇고 말고...
헤이스팅스 대위의 딸인 주디스는 형편없는 어느 바람둥이와 열애에
빠진 것처럼 보이고 그 때문에 아버지인 헤이스팅스 대위는 몹시도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때로는 격한 감정으로 그리고 때론
긴 산책 속에서의 탄식으로...
한 페이지를 넘기면 그는 이와 같이 이야기 한다.
"며칠이 지나갔다. 별로 만족스럽지가 못한 나날이었다. 무엇인가가
닥쳐올 것 같은 불안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며칠이 지나갔다....
나도 가끔은 어떤 자그마한 소품을 적곤 한다. 실제로 내가 겪어 보지도
못한 일들, 그리고 상상 속으로만 생각해 보는 어떤 일들...
그래서 때론 어떤 모험 속의 여행가가 되어 보기도 하고 고민 거리에
파 묻히지만 서너 페이지가 흐르고 나면 그 골치 아픈 문제들이
다 해결되는, 게다가 대부분이 해피 엔딩인 그러한 이야기들을 말이다.
내가 써 보는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
받은 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난 결코 그들이 어떤 슬픔이나
고통 속에 있기를 바라지 않으며 아주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이야기는
어떤 하늘의 운명이나 주님의 뜻이 아닌 나의 뜻대로 일어 나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어떤 이를 만난다거나
혹은 주인공을 가슴 아프게 했던 일들이 결국엔 모두 어떤 오해였다는
그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정작 '나'의 이야기는 어떠한가?
마치 난 어떤 소설 속의, 그것도 해피 엔딩으로 끝나기를 바라는,
주인공이 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가끔씩 난 어떤
소설 속의 엑스트라는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내 주위의 일들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리고 전혀 내가 의도하는대로
흘러 가지 않을 때는 말이다.
내게 펜이 있다면 그리고 내가 '피터'라는 소설의 작가라면
난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 이야기를 마치기를 바랄까?
아니 당장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어떻게 써 보아야 할까?
이 소설의 끝이 어떤 식으로 끝이 날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생겨나 기쁨을 가져다 줄지 불행을 가져다 줄지 그 생각을 해 보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면 당장 다음 줄에 이렇게 적어 보았으면 좋겠다.
"며칠이 지나갔다. 그리고 지난 날의 일들은 모두 헛된 공상에서 비롯된
기우였을 뿐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며칠이 지나갔다.... 라고...
문뜩 그런 생각이 든다. 마치 소설에서처럼 '며칠이 지나갔다'라는
말처럼 며칠이 훌쩍 지나갔으면 하고...
인생은 때론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는 아무 무관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고약한 바퀴와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생각해 보지 않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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