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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옛 수필

마음의 거리

by 피터K 2021. 5. 30.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가끔 차를 몰다 보면 은근히 눈길이 계기판의 미터계로 가게 된다.

별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미터계를 쳐다 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얼마나 달려 왔는지 한번쯤 쳐다 보는 것이다. 

많이 돌아 다니는 편이 아니라서 일주일에 한 100에서 120km 정도

돌아 다니게 되는데 어쩌다 한번쯤 경주라도 다녀 오게 되면 훌쩍 140에서

160km까지도 돌아 다닌다. 

차에 기름이 넉넉하다는 것은 곧 마음도 넉넉하다는 의미가 된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말이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이면 아르바이트를

다녀 오거나 혹은 가기 전에 기름을 채워 넣는다. 기름값이 계속 오른다는

소리도 있고 이제는 주유소마다 경쟁 체제가 되어 있어서 남들은 

조금이라도 싼 곳을 찾아 다닌다고 하지만 내겐 별로 차이가 없는 듯하다.

리터당 10원이 사다고 해 봐야 고작 10에서 12리터 밖에 넣지 않는

나로서는 많아야 100원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갈 때마다 늘 가득

채워 넣는 나로서는 '만땅'이라는 소리만 입에 배었을 뿐이다. 

별로 많이 돌아 다니지도 않고 덕분에 기름값도 내게는 적정 수준인

셈이다. 


'차계부'란 말을 들은 것은 얼마 전이지만 나는 차를 살 때부터

차계부 비슷한 것을 적어 왔다. 뭐 색다른 것은 아니고 기름 넣을 때

얼마나 넣었고, 거리는 얼마를 달렸고, 값은 얼마더라 하는 자질 구레한

것을 기록하는 것이다. 내게 차를 가져다 주시고 손에 키를 쥐어 주시던

아버지의 꼼꼼함에 가끔 감탄하지만 기름은 꼭 채우고 다니라던

말씀과 아애 조수석 트렁크에 차계부용 수첩까지 넣어 두신 아버지

앞에선 정말 할 말을 잊었을 뿐이었다. 덕분에 처음부터 좋은 버릇(?)이

들었고, 아직은 기름값만 기록하지만 엔진 오일이라도 갈아 넣게 되면

새로운 항목을 넣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매번 그렇게 기름을 넣을 때 마다 얼마나 달렸는지 기록하기 위해서

주유소에 갈 때마다 계기판의 미터계를 항상 0으로 만들어 놓는다. 

하지만 그 미터계 밑에는 또 다른 미터계가 있다. 차가 세상에 태어난 후

지금까지 얼마나 달렸는가를 기록하는 전체 미터계가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이 미터계는 앞서 말한 미터계와는 달리 숫자를 0으로 바꿀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나 갈수록 하나 둘씩 크기만 늘어 간다. 


또 다른 마음의 눈을 떠 보면 몇가지 미터계가 더 보인다.

어느 도시와 도시 사이의 거리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의 

거리를 재고 있는...

내가 직접 달려 가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사람 사이의 미터계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 같다. 예전엔 그렇게도 친했던 친구의 거리가

이제는 연락도 제대로 못하면서 어느새 서울과 포항의 거리보담도 

더 커져 있고 전혀 남이었던 사람과는 전혀 떨어 질 수 없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은 그런 모습을 반영한 말일까?

늘 거리를 0으로 만들고 싶었던 누군가와의 거리가 어느새 시간이 갈수록

점점 닿을 수 없는 거리로만 멀어져 가는 느낌이기도 하다. 

자동차에서처럼 하나의 단추가 있어 그 단추를 누르기만 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런 마법이 있었으면...

하지만 자동차의 전체 미터계처럼 전혀 되돌릴 수 없는 미터계도 있는가

보다. 너무나 아쉽게도...


곁에 있는 사람의 거리가 한없이 멀게 느껴지기도 하고, 지구 저 편에

있는 친구와 후배의 거리는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떠한 감정보다도 깨질 것같이 아련한 인간의 심성인가 보다. 


문뜩 보이지 않는 친구들과의 마음의 거리를 가만히 재어 본다. 

내게 소중했던 만큼 그들과의 수치가 너무 커지지 않기를 기원해 

보면서....

그리고 어느 날, 내게 마법이 주어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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