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내가 쓰던 사전은 아주 오래된 혼비 영영한 사전이다.
이 사전을 처음 샀던 이유는 고등학교 때 가장 친한 친구가 그 사전을
썼기 때문이다. 친구따라 강남 간다는 말만 있는 줄 알았지 친구따라
사전까지 함께 쓰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딘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고궁으로 소풍을 갔다가 돌아 오는 길에 교보 문고에
들렸다. 아직 한참 영어 단어를 외울 때라서 솔직히 영영한 사전을 쓴다는
것이 조금은 걱정도 되었다. 영영한 사전을 쓰는 이유는 분명히 해석도
영어로 읽어 보고 더 도움이 되라는 이유일텐데 말이다. 하지만 영어로
쓰여진 해석을 읽다 보면 또 다시 모르는 단어가 나오고 그러면 모든
단어를 알 때까지 한없이 반복해 가며 사전을 뒤척였어야만 했다.
물론 그 뒤에 따라오는 한글 설명을 바로 읽으면 되긴 하지만 웬지
그 당시에는 약간 수치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영한 사전을 사지 영영한 사전을 사?
자존심도 작용을 했는지 구지 한글 설명을 읽기 보다는 영어 설명을
이해하려고 애썼고 덕분에 더 많이 영어 단어를 공부 할 수 있었다.
그 혼비 영영한 사전을 결국 대학에 와서도 한동안 사용을 하였고
나중엔 앞 표지가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된 나의 친구이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냥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남아 있는
손때가 그래도 반가웠기 때문이었다.
단어를 외우면서 생긴 한가지 버릇은 한번 찾아본 단어에는 빨간색
펜으로 밑줄을 그어 놓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단어를 찾기 위해
책장을 넘기다가도 밑줄 그어진 단어를 보면 내가 외운 단어인가
한번 더 생각해 보고 잊어 버렸으면 먼저 외워 본다.
그렇게 책장 넘기는 재미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3학년을 넘기고 나서는 사전을 많이 찾지 않게 되었다.
일단 원서를 읽더라도 이제는 거의 한번씩 본 단어가 나오기 마련이고
공학 서적이야 늘 같은 단어만 반복되기 때문이다. 가끔 영어 과목을
들을 때나 한번씩 들추어 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사전은 이제 쓸떼없는
짐만 되고 나중에는 그냥 책꽃이에 장식으로 남게 되었다.
먼지를 뽀얗게 먹은 그 혼비 사전을 다시 찾은 것은 작년 2월쯤...
박사 과정 특례 시험이 있어서 영어 공부를 하려다 보니 사전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도서관에 앉아서 토플 문제집을 하나 가져다
놓고 영어 공부를 하는데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뒤져 본다.
찾는 단어와 숨바꼭질을 하느라 책장을 넘기는 동안 여기 저기에
빨간색 밑줄이 보였다. 어떨 때는 한 페이지에 두어개, 많을 때에는
대여섯깨까지도 나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단어를 언제 찾아 보았는지
모를 정도로 너무나 생소한 단어들이 많았다. 내가 그 때 저 단어를
외웠을까? 글쎄... 지금은 너무나 생소하고 처음 보는 단어지만
언젠가 내가 한번쯤 외울려고 했던 단어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단어만을 잊어 가는 것은 아니다. 때론 내 머리 속의 어떠한 부분도
이제는 더 이상 떠올리지 못하고 어딘가에 먼지에 쌓인채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전을 뒤적거리면서 찾아 냈던 단어가 너무나 생소하고
낯설어도 웬지 반가웠던 것처럼 내가 기억해 내지 못하고 잃어 버린
많은 기억들은 그 때도 그렇게 반가울 수 있을까?
사람은 때로 시간이 지나 잊어 먹는 일뿐만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어떤 기억을 잊어 버리기도 한단다. 너무 아픈 기억이라든가
혹은 충격적인 기억은 무의식중에 기억의 상자에서 도려내어지는
것이란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그런 기억은 없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내가 가진 아주 많은 기억들이 나에게 아픔을 주거나 상처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아주 오래된 사전을 뒤지면서 발견하게 되는 낯선 단어처럼
언젠가 나도 모르게 만나게 되는 작은 기억들이 눈물의 모습보다는
미소의 씨앗이 되어 보길 빌어 본다. 잊고 싶지는 않았던 기억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잠시 놓쳐버린 그 추억의 끈들을 이제는 하나로
묶어서 늘 웃음진 내 입술 한켠에 묶어 둘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이를 처음 만났던 순간과 대학에 붙었던 그 작은 흥분들이
때로는 힘든 나의 어깨에 지주목이 되어 주기를...
잃어 버린, 아니 잠시 놓아 두었던 기쁨들이 이제는 늘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작은 샘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직은 함께 하던 그 즐거운 추억들이 아스라이 떠 오르는 것 같다.
늘 내 곁에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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