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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옛 수필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그리며...

by 피터K 2021. 5. 30.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두툼하던 달력도 이젠 홀쭉이가 되어 한 장만이 남아 버렸습니다.

대신 사람들은 두툼한 옷으로 갈아 입게 되었고 말입니다.

스산한 바람이 귓가를 스쳐 품안으로 비집고 들어 오기라도 하는 참이면

옷깃도 여미어 봅니다. 그리고 하늘을 한번 쳐다 보지요.

올 크리스마스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은근한 기대와 함께 말이죠.


차가운 바람이 한번 몸을 훑고 지나간 후라면 가끔씩 따뜻한 차 한잔이

생각 납니다. 푸근한 스웨터를 입고 한 손에 모락모락 김이 솟아 오르는

차 한잔을 들고 있는 나의 모습을 그려 봅니다. 그리고 창가에 서서

창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 보며 뛰어 노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주어 보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럴려면 우선 푸근한 스웨터 한벌과 이쁜 컵 하나부터

마련해야 할 것 같네요. 후후..

이쁜 컵 하나. 

내가 아는 어떤 이의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가끔씩 일을 하다 보면

어디선가 향기로운 차 향이 내게 다가옵니다. 그 향은 그가 가진

초록빛 머그 컵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그의 컵은 참 재미 있게

생겼답니다. 보통 머그 컵처럼 직원통 모양이 아니라 원통 모양이 약간

굽은, 그래서 배불뚝이처럼 보이는 그런 머그 컵이었답니다. 

배 부분만 불룩한 것이 아니라 몸체가 휘어진 거죠.

그는 웃으면서 이야기 하더군요. 이걸 마카로니 머그 컵이라고 하는거야...

그에게 차 한잔을 얻어 마시는 동안 컵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 보게

되었답니다. 그는 잠시 컵을 바라 보더니 컵에 얽힌 사연을 들려 

주었습니다. 


몇달 전 그는 서울에 학회를 가게 되었더랍니다. 실은 그가 가기로 

되어 있던 학회는 아니었지만 실험실 후배가 못 가게 되어 대신

참가하게 되었던 거죠. 서울에 올라 가기 전 서울에 있는 아는 사람에게

선물을 하나 하고 싶었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는 것을

참 좋아 하거든요. 저처럼 말이죠.. 후후..

음.. 그는 학회에 올라 가기 전 날 시내에 나갔답니다. 무엇을 줄까

고민하던 그는 팬시점에서 예쁜 머그컵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죠.

그 컵이 너무 맘에 들었던 그는 그 컵을 사고 이쁘게 포장을 했답니다.

그리고 함께 넣을 자그마한 카드도 곁들여 사고 말이죠.

학교로 다시 들어 오기 전 그는 다시 편의점에 들려 티백 포장이 된

차도 하나 샀지요. 이름이 아마 동규자차였나 봅니다. 그는 전엔

그 차를 몰랐다고 하더군요. 그냥 단지 포장에 적힌 말의 유혹에 

넘어 갔던 것이죠. '아침 한 잔에 가뿐함을 느끼세요'

아마도 그 차를 받고 마시게 될 사람이 아침에 좋은 기분을 가지라는

마음에서 샀는지도 모르겠네요. 후후..

암튼 그는 그 세가지 선물을 들고 서울에 갔답니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가 있었죠. 선물 주고 싶은 사람과 전혀 약속이

안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래도 무작정 선물을 산 그 사람도 조금은

우습게 들리죠? 저도 여기서는 피식 웃어 버렸답니다.

어떻게 전해 줄려고 그랬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지하철의 코인 박스를 이용하려고 그랬어... 라고.

자기가 예전에 이용한 지하철 코인 박스는 비밀 번호만으로 열고

닫았다나요. 그래서 그 코인 박스에 선물을 넣어 두고 그녀에게

음성으로 비밀 번호만 알려 주고 찾아 가라고 전하려 그랬답니다.

하하.. 참 멋진 방법이지 않아요?

그러나 그는 나를 보고 살짝 웃더니 근데 그게 그렇지가 않더라.. 하고는

머리를 긁석였습니다. 그래? 왜? 라는 나의 질문에 그는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게 그새 다 열쇠로 바뀌었다나요... 하하하...

그래서 그는 준비해 갔던 선물을 전해 줄 수가 없었지요.

참 난감하더랍니다. 웬지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모습이 떠 오르는것만

같네요. 후후...

하는 수 없이 그는 그걸 그냥 들고 숙소로 돌아 왔더랍니다. 

애이, 이번엔 포기 하고 다음에 주어야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 학회가 모두 끝나고 그는 가까이 있는 친구와 저녁을

함께 먹었답니다. 오랜만에 본 친구라 할 이야기도 많았고 그래서

늦게까지 함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만 이 친구가 학원에 가야 한다며

일찍 자리를 일어 서더랍니다. 조금 피곤하기도 했던 그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 섰지요. 그리고 헤어져 숙소로 돌아 오기 위해 지하철 역으로

갔답니다. 시간은 이제 겨우 8시 조금 넘었더랍니다.

후후...  그런데 여기서 묘한 오기가 발동하더랍니다.

선물을 가지고 왔는데 그냥 갈 수 없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군요.

그래서 그는 다짜고짜 그녀에게 음성을 남겼답니다. 

나 어디 있는데 몇시까지 어디로 나오렴. 가져온 선물은 주고 가는게

좋겠어... 라고 말이죠.

그리고 그도 약속 장소로 무조건 갔답니다.

선물을 계속 가지고 다녔어? 라는 나의 질문에 그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아니~ 라고 대답했습니다. 어, 그럼 어떻게 했어? 다시 숙소가 들어가서

가지고 나왔어?    아니~~ 

그는 맨손이었고 선물은 숙소에 두고 나왔더랍니다. 궁금해 하는

내 모습에 조금은 재미 있는듯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은 마법(?)을

알려 주더군요. 그녀에게 컵을 선물 하는 또 다른 방법을...


그는 약속 장소를 조금 번화한 곳으로 잡았더랍니다. 

그리고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구요. 그는 주위를 돌며

다른 팬시점을 찾았답니다. 그리고 그 가게에 들어가 학교에서 샀던

컵과 같은 것을 골랐지요. 아, 그런데 같은 컵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조금 더 이쁜 다른 컵을 골랐다는군요. 그리고 작은 카드도 새로 사고

심지어 티백 차까지 새로 샀답니다. 후후.. 이번엔 이름도 잘 모르는

이상한 차가 아닌 그냥 간단한 설록차로 말이죠.

그런데 설록차로 고를 수 밖에 없었데요. 그 가게에는 설록차 이외에는

다른 티백 차가 보이지 않더라나요? 후후...

그리곤 다시 포장을 새로 하고 이 근처에서 산 것이 아니라 마치

학교에서 사 가지고 온 것처럼 모든 흔적을 다 없앴다는군요.

가격표에 붙어 있는 상점 이름, 차를 산 편의점 이름이 찍힌 봉투,

그런 것들 말이에요.

시간이 흘러 그녀와의 약속 시간이 다 되었고, 그녀가 나타 났더랍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온 선물을 건네 주었지요.


그는 이 이야기를 들려 주며 마치 수줍은 어린 아이처럼 웃고만 

있었답니다. 굉장히 쑥스러웠나 봐요. 가끔은 얼굴이 빨개지기도 했으니까

말이에요. 후후...

아직도 그녀는 그걸 모른다고 하는군요. 그 컵이 멀리서 가져 온 것이

아니라 바로 근처에서 구한 것이라는 걸 말이죠.

사실 그는 조금 뜨끔했더래요. 그녀가 선물을 받아 들고 함께 나가는데

선물이 든 비닐 봉투에 바로 머그컵을 산 팬시점 이름이 아주 크게 적혀

있었더라나요. 후후.. 그녀는 그걸 알아 보았을까요?  글쎄요...


그리고 그는 내게 자신의 초록색 컵을 들여 보이며 말했답니다.

이게 바로 그 컵이야... 원래 그녀에게 선물로 주려 했던 컵 말야..

후후후... 그 이야기를 듣고 난 살짝 웃어 버렸답니다. 

그가 계속 이야기 했지요. 그래서 덕분에 나도 이렇게 이쁘고

좋은 머그 컵을 하나 가지게 되었잖아. 후후...


이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벌써 내 잔에 가득 담겨져 있던 차를 

다 마셔 버리고 말았답니다. 내 잔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는 내게 다시

한잔 가득 차를 따라 주는 그를 보고 난 물었지요.

왜 구지 그날 그렇게 선물을 주려고 그랬어?

내 잔을 채워준 그는 다시 나를 보며 수줍게 웃었답니다.

몰라... 그냥, 그 땐 그녀가 조금 보고 싶었나봐.

그의 작은 고백에 난 미소만 지어줄 뿐이었답니다. :)



이제 크리스마스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구세군의 종소리가 거리를 가득 매울 때가 되어야 비로소 이제 크리스마스가

다가 오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정도로 가끔은 살아 가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잊고 사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창 밖에 걸어 가는 많은 사람들을 내려다 보면서, 그리고 특히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많은지 서로 소근거리며 지나가는 커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조금이나마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보길 기원해 봅니다.

그리고 조금 더 마법이 남아 있다면,

이번 크리스마스는 평화로움이 가득 차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길

빌어 봅니다. 

그렇게 모두에게 멋진 기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말이죠....




피터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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