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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옛 수필

그 웃음의 비밀

by 피터K 2021. 5. 30.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그 녀석의 키는 내 허벅지 중간쯤이나 될까?

한 손엔 어린이용 비디오를 들고 있었고, 나보다 앞서서 자기 키의

1/3이나 되는 계단을 힘들게 올라 가고 있었다....



모처럼 시험이 끝나고 교수님과의 미팅도 잘 보낸 금요일이라서

오랜만에 비디오 테잎을 빌리러 갔다. 이것 저것 고르다가 여동생이

권해준 '비트'를 찾았으나 벌써 나갔다고 했다. 원하는 비디오를

구하지 못한 나의 손엔 '메트로'가 들려져 있었다. 에디 머피가 

나오는 액션물이었다. 뭔가 폭발하는 영화를 보면 상쾌해 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영화는 재미 없었다. 내내 질질 끄는

이야기만 나열되었다.

비디오는 빌려 오는 것도 귀찮은 일이지만 가져다 주는 것도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자꾸 미루고만 있으면 정말 한달이 넘도록

방에 쳐 박아 둘까봐 빌려 오면 다음날 얼른 얼른 가져다 주는

편이다. 오늘 오후에 시장에 가서 빵도 좀 살겸 비디오를 가져다

주고 왔다. 비디오 가게는 3층에 있었는데 층계를 올라 가다 보니

한 꼬마가 힘들게(?) 층계를 올라 가고 있었다.

나한테야 계단 하나가 가쁜한 높이이지만 그 친구에겐 그 높이가

자기 무릎보다도 높았으니 올라 간다는 표현보다는 등반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도 모르겠다. 용케 넘어지지 않고 한 계단씩

한 계단씩 올라가고 있었다. 한 발을 윗 계단에 올리고는 다음 발이

같이 따라 올라 오지 않아 계단 끝에 톡톡 부딕치면서 올라 갔다.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아 보이던데...

그 친구를 뒤로 하고 난 훨씬 앞서 비디오 가게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 가려는데 조금 뒤에 그 친구가 어느새 쪼로록 따라와

있었다. 난 문을 계속 손으로 잡고 그 친구가 들어 올 때까지 기다렸다.

나란히 비디오를 반납하고 다시 나오면서도 난 문을 열어 주었다.

그 친구는 고마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자긴 힘들게 열고 들어 오는

문을 내가 가뿐히 열고 있는 모습이 경이로왔는지 나를 한번

올려다 보았다. 난 저 밑에 보이는 이 친구에게 씨익~ 하고 웃어

주었는데 자기가 보기엔 엄청난 높이의 얼굴이 가물가물 했겠지? :)

내가 걸어 가기 시작했을 때 그 친구도 총총 걸음으로 뒤 따라 왔다.

키가 내 허벅지 중간쯤 오는 녀석이니 걸음폭도 비교가 안 되는 건

당연했다. 난 벌써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그 친군 저 멀리

뒤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들리는 소리... 쪼로록~~~

이 녀석이 총총 걸음으로 달려와 나와 나란히 걷는 것이 아닌가..

후후.. 그럼 뭐하나, 난 내 발걸음으로 걸으니 그 친군 다시 뒤로

멀어지는 걸... ^_^

이 친구도 오기가 있는지 다시 한번 쪼로록~~ 하고 내 옆에 와서 선다.

난 속으로 웃어 버렸다. 짜샤~ 가서 우유 더 먹구와... ^^;



후후... 나도 어느날 갑자기 이렇게 어른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영화 '빅'에서는 어느날 훌쩍 커 버린 어른 아이가 있긴 하지만

그럼 영화에서처럼 엄청난 혼란과 우스꽝스러운 모습만 

연출했을 것이다. 나도 태어날 때에는 팔뚝하나의 크기에서 

길고 긴 27년의 세월동안 조금씩 자라서 이런 모습이 되었을텐데...

돌이켜 보면 아까 그 친구와 같이 나도 그만한 때가 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나를 내려다 보며 속으로 웃어 버린 어떤 아저씨(아니,

어떤 엉아... ^^;)도 있었을테고...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겠지만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아주 열렬히(?)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

난 당시 남자 반장이었고, 그 아인 여자 부반장이었다.

*!* 그 땐 남자 반장, 여자 반장이 따로 있었다. *!*

하루는 선생님들과 함께 양로원에 가기로 했는데 대표인 여자 반장이

무슨 일로 오지 못하고 여자 부반장이던 그 아이가 대신 왔다.

우린 같이 양로원에 갔다가 돌아 오는 길에 사이 좋게 나란히 손을 잡고

선생님들 앞에서 걸어 갔다. 기억나는 건 그 때 뒤에 오시던

선생님들이 우릴 보고는 막 웃으셨던 것이었다. 난 당시 선생님들이

왜 웃으시는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라도 웃을 것만 같다. 초등학교 2학년 남자 애와 여자 애가

사이 좋게 손잡고 나란히~ 나란히~ 걷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


어른들이 보는 세계와 아이들이 보는 세계는 그렇게 눈 높이가 

다를지 모르겠다. 어른들은 큰 키로 더 멀리 볼 수 있지만 아이들은

작은 키로 발밑에서 열심히 일하는 작은 개미를 찾아 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내 어린 시절 기억을 떠 올리면서 

문뜩 아까 만난 그 아이가 예전의 나처럼 순수하고

꾸밈없는 추억을 하나 가질 수 있기를 바래 본다. 

언젠가 나처럼 훌쩍 커 버렸을 때 그 까마득한 높이에서 이해할 수 

없던 웃음을 짓던 한 사람을 기억하고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는 추억을 가질 수 있기를 말이다. 









그건 말야, 너두 씩씩하게 잘 크란 뜻으로 지은 웃음이었어.. :)

나의 1/3 만한 아이로부터 얻은 또 하나의 추억거리인가 보다.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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