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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옛 수필

마법의 티켓

by 피터K 2021. 5. 23.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며칠동안 날씨가 왜 이 모양인지 잘 모르겠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찜통 같더니 어제, 오늘은 반팔만으로는

추위를 느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결국은 옷장 속에 정리해둔

가디건을 하나 꺼냈다. 겉옷 하나로는 도무지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실험실은 머신들 때문에 거의 24시간 

에어컨이 돌아 가기 때문에 바깥 날씨까지 서늘하면 견딜 수가

없다. 감기까지 걸리면 나만 손해이니까 미리 미리 조심해야지.. :)


78계단을 오르다가 손을 가디건 주머니에 넣었을 때 문뜩 손에 잡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무얼까 싶어서 꺼내 보았더니 티켓 두 장이 나오는

것이었다. 서울행 비행기표 하나와 또 그날 포항으로 내려 오는

아간 우등 버스표 하나. 78계단 꼭대기에 앉아 나는 잠시 그 티켓 

두 장을 물끄러미 바라 보며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나를 서울로 이끌었던 그 어느 날의 하루를...


누군가 나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며는 아무런 변명도 못 댈 것 같다.

왜 서울에 갔는가라는 질문에 말이다. 내가 흔히 하는 말처럼

그냥이라는 변명이 제일 좋겠다. 그래 그냥 아무런 이유없이 서울에

갔었던 것이다. 나의 화려한 외출 중에 하나였다고 기록하면 될까?

아니,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누군가가 무척이나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가끔은 이런 이유때문에 서울이나 대전에 사는

친구들이 부럽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아무 때나 서울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멀찌기 포항에 떨어져 있는 나로서는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친구가 보고 싶었던 이유는 그 친구가 내게 아주 장문의 e-mail을 하나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 메일을 받자마자 웬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서울 가는 차편은 모두 끊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음 날 아침까지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보고 싶고 같이 이야기 나누고 싶었던 그리움은 잠시 접어 둔 채 말이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부지런히 기숙사에서 학교로 올라 왔다. 

아침부터 일찍 서울로 갈 수는 없었다. 마침 저녁까지 해 두어야 할 일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점심 먹기 전까지 일을 마친 후에야 나는

서울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고,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4시간? 아니 4시간 30분 정도 있었나 보다. 그 시간은 내가 가졌던

어느 시간보다 소중하고 행복했었다. 하지만 행복을 너무 숨기지 

못하고 드러 내면 누군가 시셈을 하게 마련인가 보다. 

나는 그 시셈때문에 다시 포항으로 내려 오는 차에 몸을 맡길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건 아마도 천사의 시셈이었다 보다. 


신데렐라? 문뜩 그 이야기가 떠 오른다. 아마도 12시 종이 치기 전에

무도회장을 떠나야 했던 신데렐라도 그 때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차가 막상 터미날을 떠나기 시작해서 고속 도로 위로 내 달릴 때

멀어지는 서울을 뒤로 하고 아스라이 젖어 드는 행복과 함께

나는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다시 포항에 있었다.

마치 꿈이라도 꾼 듯한 환상처럼... 그리고 촉촉히 젖어 드는

묘한 미소처럼... 난 잠시 마법에 빠져 있었나 보다.



그 날도 그랬다. 마치 마법에 빠진 것처럼 말이다. 

이제는 그 행복의 기억도 차츰 스러져 가는 속에 나를 환상으로 잠시

초대했던 티켓 두 장.

기억이란 무디어지게 마련이라지만 가끔씩 이렇게 다시 그 한 장면,

한 장면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어서 더욱 행복한 것은

아닌지...

언젠가 다시 환상과 마법에 빠지고 싶으면 이 두 티켓을 손에 쥐여

잡으면 될까? 

지금은 이 티켓이 그 마법을 걸어 다시 한번 나를 그 친구의 곁으로

인도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번엔 결코 종이 울려도 끝나지 않을 무도회 속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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