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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옛 수필

고민거리 만들기

by 피터K 2021. 5. 23.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수업을 듣다 보면 교수님께서 칠판에 적으시는 내용을 노트에

옮겨 적으며 동시에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우기 교양 과목이

아닌 전공 수업의 경우에는 말이다. 수식이 칠판을 한 가득 메우고

적분과 미분이 그 사이를 장식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때론 노트에

필기는 한참을 건너 뛰기 십상이다. 노트 필기만은 깔끔히 하는 나로서는

이해와 필기를 동시에 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게 느껴지고는 한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 하나. 일단은 수업에 들어 갈 때에는 이면지로

만든 노트를 들고 들어 간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 설명하시며

칠판에 적는 내용은 거의 그대로 난잡하게 노트에 적어 넣는다.

때로는 이쪽 페이지에서 다음 페이지로 긴 줄을 쭈욱 긋기도 하면서

말이다. 수업이 끝나고 그 노트를 들여다 보면 마치 초등학교 1학년짜리가

스케치 북에 낙서를 해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후후..

일단 그렇게 노트 필기가 끝나고 나면 쉬는 시간을 빌어 도서관에 앉아

새로운 노트에 다시 깨끗히 옮겨 적는다. 그러면 교수님의 설명도

그럭저럭 이해 할 수가 있고 깨끗한 노트 필기도 얻을 수 있다. 

후후.. 이런 노력(?)이 들어가서 그런지 친구들은 강의를 빼 먹은 날이나

혹은 오픈 북 시험이 있어 노트가 필요한 날이면 어김없이 나를 찾아 

온다. 하다 못해 여자 후배도 찾아와 노트를 빌려 가고는 

'어쩜 선배님, 어떻게 저보다 더 깔끔해요?' 라고 말하기도 한다. ^^;

난 어쩔 수 없이 '피터다운' 모양이다. 후후.. :)


그렇게 노트 필기를 하다가 문뜩 't'를 쓰게 되었다. 

't'. 아무런 생각없이 이 't'를 쓰다가 옛날 중학교 시절 처음 영어를

배우던 생각이 났다. 그 때도 난 아마 무척 깔끔하려고 그랬나 보다.

영어 철자를 이쁘게 쓰기 위해서 이 't'를 가지고 무척이나 고민했었으니

말이다. 후후.. 무엇이냐고? 그건 이 't'를 쓰는데 있어서 가로 획을

먼저 긋느냐, 아니면 세로 획을 먼저 긋느냐를 고민했던 것이다.

게다가 세로 획을 약간 구부리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그냥 바로 끝내는

것이 좋을까라는 고민까지도 말이다. 후후..

빈 종이 한 장을 가져다 놓고 가로 획을 먼저 써 보기도 하였고

세로 획을 써 보기도 했다. 또 세로 획의 밑에 꼬랑지를 살짝 올리기도

하면서 어떤 모양이 제일 이쁜가 막 따져 보기도 했다. 거의 한 페이지를

난잡한 't'로 가득 채웠을 때 난 겨우 가장 맘에 드는 't'의 모양을

결정할 수 있었다. 

그게 무엇이었냐고? 후후.. 불행하게도 지금은 그 모양이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  그 후로도 몇번씩 't'의 모양은 바뀌여 왔고

그 때마다 아까운 종이는 't'의 폭탄 세례를 맞으며 휴지통으로 들어

갔으니까 말이다. 지금은 아무런 생각없이 가로 획을 먼저 그으며

세로 획의 밑부분은 약간 굽게 만드는 모양으로 적는다. 

그렇게 나의 오랜 고민 거리 하나는 해결된 셈인 것이다. :)


노트 필기를 옮기면서, 그리고 문뜩 't'를 쓰게 되면서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던 후로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예전에는 참으로

나를 고민하게 만들던 것들을 이제는 아무 망설임없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말이다.

아마 그런 예는 't'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으리라.

음... '어머니'란 말에 대해서도 그런 것 같다. 어릴 때는 늘 '엄마'라고

불렀다. 그리고 또한 거의 반말같은 수준으로 말이다. 

'엄마, 밥 줘', '엄마, 일루 와 봐.'... 후후..

그렇지만 대학을 들어 오고 나서 언젠가부터 나도 이제 '어머니'란

말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에 전화를 하면서

처음으로 '어머니'란 말을 사용했고 또 존대말로 바뀌기 시작했다.

물론 어색했다. 어쩔 때에는 내가 계속 이렇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도 어느새 익숙해져 버려서 이젠 아무런 꺼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내겐 이런 일들이 많이 생기겠지? 후후...

지금은 너무나 어려워서 잘 하지 못하는 것들이 어느새 시간이 흘러 가면서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 되고 또한 너무나 익숙해져서

아무런 감정도 못 느끼게 되는 것들이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는 일이라든가 혹은 사랑한다는 말을 전할 때에도

아마 처음에는 무척이나 떨리고 고민스럽지 않을까 싶다. 

어떻게 손을 잡을 수 있을까? 또 어떻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또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익숙해 지고 아무런 고민이나 

주저함없이 손을 잡거나 사랑한다고 말을 할 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늘 처음 할 때처럼 두근거렸으면 좋겠고, 말을 건낼 때마다 진심으로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랫동안 손을 잡고 다녀도 매번 만날 때마다

이번에는 어떻게 손을 잡을까 고민하는 것은 늘 새롭지 않을까?

그리고 마치 't'를 어떻게 쓸까 고민하던 것처럼 이번엔 어떻게 잡고

있을까 고민해 보고 싶다. 그런 새로움이 있을 때

고민과 근심은 언제나 행복할꺼 같다. :)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겠다. 내게 익숙해져 버린 것들을 말이다.

그리고는 새로운 고민에 빠져 보았으면 좋겠다. 

오늘은 이빨을 어떻게 닦아 볼까? 음성엔 '응, 나야' 라는 말 말고

다른 말로 시작해 볼 수 없을까? 전화를 받을 때 '여보세요'말고

다른 말로 받을 수 없을까? 좋은 꿈꾸라는 말 말고 다른 말로

전화를 끊을 수 없을까? :)

고민은 가끔 즐거울 수 있는 일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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