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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옛 수필

잊고 있었던 또 한가지...

by 피터K 2021. 5. 23.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롤링 페이퍼(Rolling paper)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지...

종이를 만다는 뜻이 아니라 종이를 돌린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정확할꺼

같다. 맨 첫머리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종이를

돌리는 것. 그리고 그 종이를 받은 사람은 그 사람에게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이라든가 혹은 남 몰래 남기고 싶었던 말등을 적어 주는 것이다.

한 사람이 적고 나면 다시 옆 사람에게 돌리고, 계속 반복하면서 함께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쭉 다 듣는 셈이 되는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때 이 롤링 페이퍼를 처음 해 보았다.

교련 선생님께서 갑자기 수업 시간에 종이를 한장씩 준비하라고 하시고는

롤링 페이퍼를 하는 것이다. 그 때 나는 반장이었는데 친구들이 써 준

글 중에서 기억에 남는 한 구절이 있다.


 [ 아무리 목소리 큰 사람이 출세하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네 목소리는

   너무 커 ! ]


후후후... 나는 잘 몰랐지만 나의 목소리가 무척 큰 모양이다. 

점심 시간이 끝나고 5교시가 시작 될 때쯤이 되면 아이들은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고는 했는데 수업이 시작해서 선생님이 들어 오시면 아이들을

다 깨울 필요없이 내가 일어나 '차렷'하는 구령만 붙이면 모두 깨어나곤

했으니까 말이다. :)


그 롤링 페이퍼를 오랜만에 해 보았다. 이번에도 갑자기 말이다. 

12월 31일 마지막날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카페에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여자 애 하나가 자신의 다이어리의 몇 장을 뜯어

내더니 그 위에 우리들의 이름을 적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시작된 롤링 페이퍼. 많은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달랑

우리 셋만 있었는데 말이다. 


  [  1995년을 마지막으로 보내면서 우리 서로 마음속에 쌓아 두고 있던

     것이라든가 혹은 하고 싶었던 것을 마지막으로 적어 보자 ]


친구는 우리에게 그 한 장씩을 돌리며 이야기 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적어야 할지 막막했지만 오히려 갑작스러운 분위기가 

아무런 가식이나 꾸밈없이 적고 싶었던 말을 마구 적게 만들었다.

하고 싶었던 말들, 나의 생각들, 그리고 친구들에게 가졌던 감정들을

모두 적어 버렸다. 1995년의 마지막 날 오후에 말이다.



문뜩 그 친구중에 한 명이 적어준 말이 생각이 난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사에 대해서 모른 척하고 살았었다는게

    사실이지. 오늘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서 얘기하며

    즐길 수 있다는 그것에 대해서도 또 감사.


그 글을 읽으면서 나도 참으로 감사라는 말, 그리고 고맙다는 말을

많이 잊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랑한다는 말처럼 어려운 말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도 인색했는지 모르겠다.

한 해를 접으면서 그리고 또 하나의 멋질 한 해를 펴면서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제는 그 말을 아끼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전에 논문을 끝내면서 감사의 글때문에 또한 며칠 고민했던 기억도

난다. 다른 사람들의 평범한 감사의 글처럼 아는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나열하며 마치 무슨 규칙처럼 쓰기가 싫었던 나는 아애 아무의 이름도

그 감사의 글 속에 넣지 않았다. 후후.. 물론 나중에 그 글을 읽고

삐져 버릴 친구가 있을지 모르지만 웬지 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틀에 박힌 문구하며, 일일이 나열되는 이름이라니..

(그래서 처음에 교수님의 이름도 넣지 않았다. 그랬더니 선배형이 한다는

말이, '피터, 너 참 고분고분하고 일두 잘 하는데 꼭 이상한데서 

개기는 버릇이 있단 말이야'... 후후.. 그래서 결국 교수님의 이름은

넣을 수 밖에 없었다... ^_^  )


감사라는 말이 쉽지 않은 것처럼 표현을 못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하지만 감사의 글에 이름을 나열하는 대신 적어 넣은 말처럼

진정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으면 긴 감사의 변명을 늘어 놓기 보다는

정말 그 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

늘 건강한 웃음으로 나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말이다.


롤링 페이퍼에서 얻은 또 한조각의 감사와 그리고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감사의 뜻들이 항상 이루어지는 한해를 살고 싶다.

아마도 그것이 내가 바라는 1996년의 작은 소망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