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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옛 수필

좋은 열매를 기다리며...

by 피터K 2021. 5. 23.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학교에서 시내로 나가려면 102번이나 300번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나가야 한다. 학교가 포철 직원 단지 내에 있다 보니 시내 구경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래서 어쩔 때는 몇 주일씩, 혹은 몇 달씩 

학교안에서만 생활 하기도 한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가다 보면 포철 직원 단지를 지나 포항 성모 병원 앞

도로를 지나게 된다. 그 도로의 양 옆은 예전부터 논이었다. 

시간이 흘러가고 그리고 또 계절이 바뀌는 것을 정말 아무런 꾸밈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었다. 

봄이 되면 그 논은 모자리를 위하여 물을 흥건히 담게 된다.

여름이 되면 아직 파랗기만 한 벼가 술렁대고, 가을이면 그야말로

자연이 만들어 내는 황금빛 옷을 갈아 입게 된다.

겨울이면 추수가 끝이 나고 아무 것도 남겨진 것 없는 횡한 들판으로 

변하기도 한다. 늘 그래 왔듯이 말이다.


맨 처음 학교에 와서 성당에 나갈 때 친구 하나가 버스 안에서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도 등교길에 좌우로 논이 

있었다고. 그리고 그 논이 추수를 3번 하면 졸업을 할 꺼라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봐 왔다고. 후후... 마찬가지지 않을까? 항상 이 거리를

지나면서 이 논을 바라보며 4번만 추수를 하면 나도 대학의 생활을 마치고

졸업을 한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차안에 앉아 늘 스쳐가는 논의 변화에 물끄러미 보며

한번, 두번씩 추수하는 것을 세어 보곤 했다. 

그리고 어느새 그 4번의 추수도 모두 끝이 나고 2번의 추수도 덤으로

끝이 나 버렸다.


그래서 일까?

처음 대학생이 되었을 때 가졌던 묘한 설레임이, 그리고 매 주일 성당에

나가면서 하루씩 커 가는 벼를 보면서 가져 오던 나도 그렇게 커 간다는

느낌이 이제는 무디어져 버렸다. 대학생이란 명찰을 떼어 버린지도

벌써 2년이 지났고 내가 언제 대학생이었던가 하는 생각도 가끔 드니 말이다.


그 벼와 같이 커 오면서 나는 참 많은 것을 잃기도 했고 얻었다는 느낌이

든다. 우선 어린 아이 같기만 하던 동심을 잃었고 반면에 세상에 살아가면서

익혀야 할 것들을 많이 얻었던 것 같다.

한 해 한 해 정성을 들여 벼를 기르고 추수하는 농부의 마음처럼

나도 매년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나의 마음 속에 키우고 거두어 들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시간이 지나면 곧 이 추위를 잊게 해 줄 봄이 다시 올 것이다. 

지금 나의 마음 안 창고에 쌓여 있는 곡식들을 생각 하며, 

그리고 내년 봄에 과연 어떠한 것을 새로 심어 볼까 하는 고민도

즐겨 봄직하지 않나 생각한다.

아주 멋지고 열매가 풍성한 것을 심기 보다는 아직은 내가 정성껏

가꾸고 기를 수 있는 것을 심었으면 좋겠다.

늘 그 거리를 지나면서 4년을 세었던 것처럼, 지금은 몇 해가 

지나야 할지 세지 않아도 되는 풍성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서

말이다. 


기다림은 가끔 사람을 지치게도 만들지만 강하게 만들기도 하고

오히려 여유롭고 편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지금 나의 마음 속에 오래전부터 심어 두었던 그 '사랑'의 씨는

비록 올해 추수하지 못하더라도 언제까지나 조금씩 자라는 것을

지켜 보고 싶다. 좋은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PS: 난 참을성이 없는 것이 조금 탈이라면 탈이다. 올해는 그 참을성도
    심어 가꾸어 보아야 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