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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옛 수필

너무나 소중한 하루

by 피터K 2021. 5. 23.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거금 3만원을 주고 제작년에 마련한 다이어리의 맨 첫 장은

월별 계획란으로 시작한다. 한 달의 내용이 한 눈에 들어 오도록

되어 있는 것 말이다. 여기에는 녹색으로 된 계획과 파란색으로 된

계획의 두 종류가 있다. 녹색으로 된 것은 그때 그때 필요한 사항을

적어 둔 계획이다. 며칠날까지는 project proposal 마감이고, 언제부터는

연수 기간이고, 아버지의 여행 계획이라든지 기타 등등 내 스케줄에

관한 내용이다.

*!* 아버지의 여행 계획이 나의 다이어리에 적혀 있는 이유는 아버지가

외국으로 나가시기 때문이다. 지난 주 화요일날 아버지께서는 

대우가 주관하는 해외 산업 시찰을 떠나셨는데 가시기 전에 전화 하지

않았다고 어머니께 꾸중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 *!*

그리고 파란색으로 된 것은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기억해야 할

일들을 적어 둔 것이다. 누구의 생일, 부모님의 결혼 기념일,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일 등 매년 챙겨야 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 말이 되면 책상에 앉아 새 월간 계획표를

짜기 시작한다. 작년에 적어 두었던 수많은 일들 중에서 필요한 것만

골라서 따로 옮겨 적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식구들과 친구들의

생일. 아버지의 경우에는 음력이라서 일일이 따로 계산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 꼬박 꼬박 기억을 하고

전화 연락이라도 드려야 불효 자식이란 소리를 안 듣게 된다.

게다가 매월 용돈을 집에서 타기 때문에 이런 것은 *특별히* 잘 챙겨야

한다. ^^;

여동생의 생일도 그렇다. 이제 막 고등학고 3학년이 되는 사춘기의

소녀라서 그런지 그런 소소한 일에도 금방 신경질을 내곤 한다. 

작년에는 너무나 정신이 없어서 다이어리에 적어 놓고도 잊어 먹어

당일날 부랴부랴 집에 연락해 겨우 입막음(?) 한 적도 있었다. 

너무나 어린 여동생을 둔 죄(?)랄까... 집에 가면 친구를 만나느라

늘 늦게 들어 가고는 하는데 가끔 집에 들어 갈 때 뽀로통한 여동생의

표정을 볼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여동생에게 이렇게

핑계를 대곤 한다.

"야! 너도 대학생 되어 봐.. :) "


그렇게 생일이나 결혼 기념일과 같이 해마다 되풀이 되는 일 말고도

때론 계속 기억하고 싶은 날도 생기게 된다. 그래서 작년의 월간 계획표를

차근차근 읽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처음에는 녹색으로 표시 된 것이라도

새해가 바뀌면서 파란색으로 새로 표시되는 것들도 있기 마련인 셈이다.

그렇게 월간 계획표의 하루 하루가 자꾸만 채워지는 것이다.


오늘 문뜩 들여다 본 월간 계획표에 파란색 글씨가 하나 보인다.

예전에는 없었지만 녹색에서 새로 파란색으로 바뀌는 것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이라면 그냥 그렇게 무덤덤하게 넘어갈지도 모르겠지만

이 날은 조금 의미가 다르게 느껴진다. 매년 일정하게 일어 나는 

생일이라든가 그런 것이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겠지만 꼭 1년이

되는 날이라서 그런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기념하는 날로서 가장 값어치가 있는 날이라면 바로 이렇게

1년이 되는 날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나 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기념식(?)이라든지 축복할 만한 일은 계획하고 있지

못 하다. 요즈음 너무나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계획이 있다면

그 날은 다른 날과는 다르게 조금은 특별하게 지내고 싶을 따름이다. 

하루 종일 이 날이 무슨 날인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다가 오는 그 날 뿐만이 아니라 아직 빈 다른 많은 날도 그렇게 파란색으로

많이 낙서가 되어 있으면 좋겠다. 하루 하루가 아무런 의미없이 지나가는

날이 아닌 축복받은 하루가 될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이렇게 허송 세월 보내는 것처럼 축 늘어져, 일에 치이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참 밝게 웃으며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너, 혹시 아니? 오늘은 나에게 있어서 참 소중한 날이야..." :)


그렇게 많은 날들을 파랗게 채우기 위해서는 조금만 더 열심히 살아야

겠다. 시간에 이끌리기 보다는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하루가 되어야

이 빈 하루를 나중에 파란색으로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 다이어리 전체가 파란색으로 물들어 있기를 희망해

본다. 

"이야아, 오늘은 또 무슨 날이네..."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기억할 만한 하루가 생겼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인줄은 정말 몰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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