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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옛 수필

오래전 그 날...

by 피터K 2021. 5. 23.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나의 다이어리의 맨 앞 장은 월간 계획표로 되어 있다. 

한달의 날자별로 해야 할 일과 약속을 적어 넣을 수 있는 작은 칸으로

나누어져 말이다. 다이어리에 있는 펜은 녹색이라서 약속등과 같은 것은

녹색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가끔 중간 중간엔 파란색 노트가 적혀 있기도

하다. 이건 내가 1996년을 시작하면서 작년에 있었던 일중 기억할

일만 따로 옮겨 적을 때 적어 놓은 것이다. 친구들의 생일, 그리고

부모님의 생신, 제사날 등등... 

그리고 언제든지 내가 그 약속과 기억할 일을 적어 넣기 위해 

인덱스 카드를 끼워 놓았다. 

6월을 시작하는 첫 날, 나는 5월의 기억을 접고 6월로 인덱스 카드를

옮겨 끼웠다. 순간 눈에 가득 들어 오는 하루가 있었다. 작년 6월의

오래전 그 날이 말이다.


첫 고백 날.

아무런 꾸밈도 없고 아무런 모양새도 갖추지 않은 내 글씨 몇 자.

기억하기 위해서 따로 파란색으로 적었던 글씨가 한동안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그게 6월이었구나...


일년전의 일인가 보다, 벌써. 처음에는 그저 친구로 서로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들어 주며 친하게 지내던 아이가 한 사람 있었다.

매주 성당에서 만나며 다른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서로 부담없이

지내던 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나의 마음은

열리지 말았어야 할 부분을 열게 되었고, 웃음 이외에는 서로 나눌 수

없었던 모습이 안타까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 자신이 많이 두려웠다.

나에겐 쓸떼없는 후회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습기도 하고

어처구니 없는 한 생각이 언제나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는 작은 사연이었나 보다. 

언제나 거기서 벗어 나고 싶었지만 나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에

많이도 얽메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늘 나를

떠났다. 

그래서 그렇게 많이 주저 했는지도 모르겠다. 멀리서 지켜 볼 수 밖에

없는 나의 모습이 가끔은 초라했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나 보다. 내게 기대하지 않았던 삐삐가 오게 되었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결코 하지 말았어야 하는 한 마디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너를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하고 나서 이제는 멀리서만 바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보다는

어쩌면 이제 곧 이 아이도 나의 곁을 떠날꺼라는 생각이 앞섰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너무나 자신이 없었던 탓일까?

그 말을 한 후로 난 늘 두려움에 사로 잡혀야만 했다. 

나도 모르게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왜 사랑한다는 그 말이 헤어질 준비를 하는 첫 마디가 되어야만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막상 나의 곁을 떠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리고 내가 1년 동안 

그 마음에 들어 가려고 문을 두드렸지만 결코 열어 주지 않던 그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열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의 머리 속에는 그 아이의

말보다는 단 한마디의 말만이 새겨지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아....


고백한지 1년이 되면 무엇인가 기억에 남을 멋진 추억을 그려 주고

싶다던 내 작은 소망도 이제는 내 다이어리에 남겨진 채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다. 화이트로 하얗게 그 파란 노트를 지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하루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채 가끔씩 나의 마음을 아리게 할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그 날이 다가 오기 전에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은 도피의

열망은 언제까지나 나를 잡아 보채지나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 날 하루만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잃어 버린 하루로 지냈으면

좋겠다. 

잠시라도 눈을 뜨면 따가운 여름 햇살에 눈이 부셔

눈물을 흘렸다고 핑계라도 댈 수 있을까? 



이제는 다시 그러한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래 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떠나 보내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 보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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