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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옛 수필

음성에 관한 작은 생각들

by 피터K 2021. 5. 23.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삐리릭~ 삐리릭~"

삐삐가 오는 소리다. 난 얼른 바지 주머니에서 삐삐를 꺼내서 확인해 본다.

'4662878[10]'

어, 벌써 10번째 음성이다. 요즈음은 게을러졌는지(?) 음성이 곧잘

10개가 채워진다. 음.. 곧 몇 개를 지워야겠네...

이럴 때마다 나는 고민에 빠지고는 한다. 

지금 들어 있는 10개의 음성 중 어떤 것을 지워야 할까?


나는 음성이 녹음되면 듣고 나서 거의 지우지 않는 편이다.

아주 사소한 말이 녹음되어 있더라도 말이다. 왜냐고 물으면

사실 할 말이 없다. 난 '그냥~'하고 대답할 수 밖에.

구지 이유를 따진다면 음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내 비밀번호를 눌렀을 때

'수신된 메세지가 없습니다.' 라고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웬지 그런 소리를 들으면 뭔가 텅 비어 버린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나와 관계된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았다.

드물게 유치원 졸업장도 있고 국민학교 때 받은 성적표라든가 아니면

고등학교 때 받은 모의고사 성적표까지 말이다. 집에 가면 내 동생 방의

옷장 안에 내 사물함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가끔은 집에 가서 그것들을 들추어 보기도 한다. 처음 그 뚜껑을 열 때는

26살 먹은 더벅머리 청년 피터이지만, 유치원 졸업장을 펴 보고 있을 때는

유치원생 피터가 되고, 고등학교 때 멋모르고 쓰던 일기에서는 까까머리

고등학생 피터로 변해 간다. 가끔씩 지어지는 미소를 담으며 말이다.

대학교 1학년 때에는 숙제를 내고 나서 돌려 받으면 그것까지 모아 두었다.

물론 그렇다면 시험본 시험지도 있겠지? 후후.. 그래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는 우리 과의 정보문헌보관소쯤으로 여겨졌고, 후배들이

나의 모든 시험지며 리포트며 다 얻으러 왔었다. 상자 가득히 담긴

이것저것에서 필요하던 것을 찾아 주던 생각이 난다.

하지만 이사를 하게 되면서, 그리고 그 분량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했을 때는 너무 마음 아팠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중요한

것들은 아닌데 왜 그리도 소중하게 여겨졌는지...


비단 음성이나 시험지, 답안지 같은 것만이 아니라 키즈에서 받은 메일도

꾸준히 모아 두었다. 하루는 포워딩된 메일을 각 사람별로 나누어

저장하려고 일을 벌였는데 그만 글자 몇 개가 깨지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 당시에는 포워딩되는 메일이 OS와 한글이 달라서 일일이

converting 해 주었어야 하는데 그만 다수가 깨져 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글 코드가 같아져서 다 모아 두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 것들이 모두 소중하다고 여겨지고 그리고 기억에만 남기보다는

항상 내 손에 가질 수 있어야 된다고 믿는 나는 음성을 지워야 할 때가

제일 가슴 아프다. 이건 녹음을 시킬 수도 없을 뿐더러 종이에 남길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녹음 시킬 수 있는 장비가 있다면 일일이 다

녹음을 남겨 놓았을 것이다. 후후..


오늘도 10번째 음성을 받았다. 그래서 녹음된 10개를 모두 들어 보면서

어떤 것을 지울까 참 많이 고민했다. 물론 그게 다 사랑하는 이의

사랑하는 고백을 담은 음성은 아니다. 

*!* 위의 문장은 전체 부정문이 아니군.. 그 중에는 하나쯤 그런 고백이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하나쯤 있나??  후후.. :)  *!*

하지만 지우는 것이 왜 그리도 아까운지 지우려고 생각하는 것은 

꼭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 본 다음 지우는 키인 '8'번을 누르게 된다.

그리고 '메세지가 삭제되었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리면 왜 그리

아쉬운지... 그래서 한 때는 음성 메세지 버퍼가 무한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도 해 보았다. 후후.. 하지만 그건 실현 가능한 일도 아닐 뿐더러

그럼 오히려 다른 것 하나를 잃게 될 것 같다.

내가 음성을 지워야 하기 때문에 지워진 목소리라든가 그 내용이

아쉬움으로 남는 것 같다. 아쉬움은 늘 그리움으로 쌓이게 되고

그래서 그런 것들이 소중함으로 기억되는 것은 아닌지...


오늘도 10개의 음성중 5개를 지우면서 이제는 다시 듣지 못할 목소리와

내용을 가슴 깊숙히 새겨 본다. 그리움을 한겹 한겹 접어 가면서

말이다.  :)



ps: 그렇다고 나에게 음성을 남기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후후.. 난 오히려
음성 받는 것을 더 좋아 한다. 왜나하면 늘 그리움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늘 많은 음성을 남겨 주기를.. :)

ps: 삐삐에 관한 우스개 소리 하나.. 누군가 친구에게 삐삐를 쳤는데
인사말로 다음과 같이 나오더란다...
"당신이 잘 생겼다고 생각하시면 8번을 누르세요"
이 녀석은 당당히 8번을 눌렀다고 한다. 그랬더니 들리는 안내말.
"잘 못 누르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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