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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옛 수필

푸념 늘어 놓기

by 피터K 2021. 5. 23.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노인 목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 노인이 내게 무얼 설명하면서 땅바닥에 집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에서 내가 받은 충격은 잊을 수 없습니다.

집을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꺼꾸로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의 순서로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세상에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붕부터 그려온 나의 무심함이 부끄러웠습니다.

나의 서가(書架)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낭패감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책을 읽다가 '건축'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한동안 그 노인의

얼굴을 상기합니다.


- 신영복(돌베개에서 펴낸 '나무야 나무야'에서)


나라면 집을 어디서부터 지을까? 아마 나도 집을 지붕부터 짓기 시작하지 

싶다. 그래서 그럴까? 가끔은 내가 짓는 집이 무너지기도(?) 한다.


실은 요즈음이 그렇다. 

*!* 이렇게 투덜거리는 것도 조금은 사치가 아닐까 싶다. 

이럴 시간도 아까운 판인데 말이다... 쩝... *!*

해야 하는 일이 조금 많이 쌓였다. 음..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겪어온 수많은 어려움보다 그리 어려운 시절은 아니다.

가장 어려웠던 때는 작년 이맘 때쯤이 아닐까? 석사 졸업도 해야 했고,

막바지에 몰린 프로젝트 마감도 했어야 했고, 또 마지막으로 틈틈히

5000년이나 되는 우리 나라 역사를 공부하기도 했어야 하니 말이다. ^^;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의 내 상황은 그다지 어려운 시기만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참 묘한 것은 맡겨진 일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는

주어진 일이 얼마나 어려우냐에 달렸기 보다는 얼마나 그 일을 할

여건(?, 글쎄.. 이건 무슨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이

잘 갖추어졌느냐에 달렸다는 것이다. 아무리 힘이 드는 일이라도

잘 해 낼 수 있는 용기와 조금의 대담성만 있으면 잘 해 낼 수 있는

반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의욕과 용기가 없으면 한참을 헤매게 

되는 것이다. 

어쩐지 지금 나의 상황이 꼭 후자같다는 느낌이 든다. 하고자 용기만

내면 잘 해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다.

덕분에 어영부영 하다 보니 앞서 소개한 일화처럼 어느 새 집을

지붕부터 지어 버린 꼴이 되었고 지금은 한참 기우뚱 거리는 집에

이런 저런 대들보와 받침대만 세우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다. 

사람이 이런 슬럼프에 빠지면 한없이 힘이 드는 모양이다.

밤에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워 있으면 이상하게도 관 속에 누워 있다는

생각도 드니 말이다. ^^;

*!* 음.. 내가 어쩌다가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누...   T.T   *!*


기운을 조금 차려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수리가 필요하더라도, 그리고 어쩌면 처음부터 다시 집을

짓기 시작해야 할 지 몰라도 주춧돌을 먼저 쌓고 기둥을 세워야겠다.


그리고 내게 조금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잘 해 낼 수 있게 힘이 되어

주는 친구들의 따뜻한 위로이다. 그냥, 아무런 이유없이 그런 위로가

그립다.



이제는 조금 더 잘 해 낼 수 있겠지?  :)




ps: 실은 처음에 '유서'를 쓰고 싶었다. 
    죽을꺼냐고? 어이~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단지 마음 정리를 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
    .....
    하지만 다음 번엔 '유서'도 한 번 써 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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