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기숙사에 살면서 이사라는 것은 그다지 자주 있는 행사는 아니다.
일년에 한번씩 이사철이 있게 마련이고, 그나마 현재 살고 있는 방에
만족을 하고 있으면 졸업할때까지 한번도 이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이사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작업이 아니라서 한번이라도
이사를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웬만해서는 다시 이사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짐을 싸는 것도 문제거니와 그 짐을 옮겨 가는 것만 하더라도
하루내내 중노동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에는 거의 매년마다 이사를 했다. 방돌이가 바뀌면서
그리고 신입생들을 위해서 방을 내어 주면서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만 했다.
대학원에 들어 오면서 졸업할때까지는 결코 옮기지 않겠다며
온갖 살림살이를 더 채워 넣었던 우리 방으로서는, 대학원 신입생의
3인 1실 방배정으로 말미암아 짐만 더 지운 셈이 되어 버린채 올 초 이사를
다시 하여야만 했다. 이렇게 이사를 한번 하게 되면 나도 모르는 새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물건들을 잊어 먹게 마련이다. 특히나 버리기에
아까워서 모아 두었던 시험지나 답안지, 그리고 리포트등등 하며,
짐을 꾸리기 어려운 것들은 과감히(?) 버리게 되고 만다.
또한 책상 서랍의 경우에는 일년내내 정리를 하지 않다가 이사철이 되어서
이사를 하게 되면 모처럼 새 단장을 하기도 한다.
나의 책상 서랍중에서 맨 마지막 서랍은 그동안 받은 편지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 이사를 하면서 그동안 무작정 받은 순서대로 쌓아 두었던
편지들을 보낸 사람별로 정리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책상위에 200여통쯤 되는 편지를 수북히 쌓아 두고 한사람씩 한사람씩
정리를 시작했다. 제일 많은 편지를 보내준 고등학교때 친구...
편지로 우정을 쌓은 친구... 크리스마스 카드는 보낸 사람 관계없이
하나로... 그리고 또...
그렇게 편지를 분류해 가고 있는 동안 편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보통 가게에서 파는 아무런 볼품없는 관급 봉투...
다른 편지들은 그래도 팬시점에서 산 알록달록한 봉투들이었지만
이 편지 하나만은 주소만 달랑 적힌 밋밋한 봉투였다.
보낸 사람은 우리 아버지셨다.
아마도 재작년쯤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정년퇴임을 앞두시고
한참 고민을 하고 계실때였다. 국장 진급을 놓고 인사이동에서 제외되시자
회사를 그만 두실 것인지, 아니면 정년이 얼마 안 남았으니 마저 근무를
하시려는지 한참이나 마음 고생 하실때...
처음 배우신 워드로 깨끗하게 찍어서, 관급 봉투에 그냥 덩그러니 넣어
보내신 편지였다.
나는 편지를 꺼내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보통의 편지와는 다른...
당신의 고민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아빠는 가끔 너무나 외로움을 느낀단다. 그냥 아무런 이유없이
외로와 지는 구나.. 그럴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그동안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항상 나에게 있어서
아버지라는 분은 듬직한 분이셨으니까.. 아니, 오히려 말이 없으셨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느껴 왔는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나도 기숙사 방에 홀로 앉아 깊은 외로움에 빠지고는 한다.
막상 가족들과 떨어져 있다는 느낌에... 그리고 무언가를 함께 나누고
싶은 친구가 보이지 않을때면... 그러면 항상 가족들이 그리워진다.
아마도 그 품에 있다면 이런 외로움쯤은 훌쩍 달아나 버릴텐데.. 하고..
하지만, 그 가정이라는 테두리안에 항상 어른이신 아버지가 그런 외로움을
가지고 계실 줄은 몰랐다. 오히려 온 가족들의 근심을 다 지셔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또 다른 외로움일지도 모르겠다. 자기 자신은 누군가에
의지하지 못하고 항상 강한 모습을 보여하만 하니까 말이다...
처음으로 난 아버지의 힘이 빠진 어깨를 알게 되었다.
... 지금 내게 지워진 짐은 그동안 나를 위해서 아버지께서
지어오신 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당신의 그 작아진 어깨를 언제 다시 편 모습으로 볼 수 있으련지..
정리해야할 편지들 위로 어느새 나의 눈에서 떨어진 새 편지 한통이
보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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