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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옛 수필

1급 전염병

by 피터K 2021. 4. 18.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각기 자신의 색깔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한다. 십인십색(음..hanterm에서 한자를 쓰는 법을 몰라서...)이란 말처럼..

결국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반응하는 모습이 다르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화가 났을때를 보면, 남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억제 못해서

마구 떠들어 대는 사람도 있고, 혹은 속으로 가만히 삭이면서 조용히 있는

사람도 있다(실은 이런 사람이 더 무섭다...)

그럼 나의 색깔은 무슨 색일까? 화가 났을때의 반응하는 모습으로 따지자면

나는 후자에 속하게 된다. (하하... 따라서 나는 화가 나면 무섭다.. ^_^ )

괜시리 마음 상하는 일이 있거나, 혹은 투정을 부리게 되거나, 아님 열을

받았으면 다른 사람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못되게 굴지 않고 조용히 앉아

맘속에 차근차근 삭이는 편이다. 그러면 웬지 우울해지고.. 친구들은

나에게 말을 걸기 어색해 한다. 나도 기분이 나빠서 조용히 있는 애들에겐

겁이 나서 말을 걸기가 힘이 드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가끔씩 조용해 지는 것은 비단 화가 났을때만은 아니다.

너무 피곤하다거나, 일에 치여서 지쳤을때에도 그냥 조용히 말없이 살곤

한다. 침묵은 칼보담도 무섭다고 했던가? 그런 모습이 친구들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모습인가 보다.. 그래서 가끔씩 오해를 사기도 한다. 

피곤해서 가만히 있을때에도 친구들은 내가 화가 난줄 알고는 어색해

하니까 말이다. 아고.... 그렇게 친구들에게 어색함을 안겨 주려고

그런 것은 아닌데....


며칠전에도 그랬었다. 성당에서 친구들과 부활절이라고 행사를 하고 나서

기운이 쪼옥 빠진 날에도...

성당에 작은 보컬 그룹이 하나 있는데 이 팀이 부활절 전야 행사로 생활

성가 발표회를 가진 것이다. 보컬팀의 이름은 '트리보스'라고 하는데

라틴어로 '다져진 길'이라는 뜻이라지 아마...(성당 보좌 신부님께서

지으신 이름이다..)

단지 목소리가 미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이 보컬팀의 리드 싱어로

발탁(?)이 되었다..(음냐...)

준비하는 노래들이 그리 익숙한 것들이 아니라서 우리 보컬팀은 일주일전부터

매일 노래 연습을 해야 했다. 드럼과 키타, 신디사이져 키보드까지 총동원이

되어서 말이다. 파트를 2부로 나누어서 할 수 있는 노래는 나누어서 2부로

연습을 하고, 그리고 맨 마지막 순서에는 015B의 '이젠 안녕'으로 멋진

피날레를 장식하고... :)

특별히 중간에 고객 서비스(?)를 위해서 '마법의 성'도 넣었지.. 나의

독창곡으로...(에고.. 목 아파라... 콜록콜록.. 켁켁...)

일주일간을 계속 노래를 부르고 서로 입을 맞추고(음.. 조오기 딴 생각하는

사람있군..) 독창 연습도 하고 그랬다. 그리고 부활절 당일.. 8시 40분부터

공연이 시작하므로 우리는 4시에 모여서 마지막 리허설을 했다. 모든 곡을

처음부터 악기에 맞추어 불러 보았다. 이제 공연시간...

읔... 그런데 리허설때 너무 열심히 연습해서 그런지 막상 두어곡 부르고

나니까 벌써 목이 잠기는 거다.. 아직 '마법의 성'두 안 불렀는데... :(

혹시나 해서 사다 놓은 생수를 홀짝홀짝 마시고 목을 축여가며 무사히

공연을 마칠 수 있었다. 

발표회가 끝나니 나에게 갑자기 오빠부대가 생겼다. 하하.. 관객의 대부분이

내가 예전에 교리교사 할 때 가르쳤던 아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참에

아애 연예계로 투신해??  ^_^


어수선한 뒷풀이가 지나가고 우리는 악기를 정리했다. 악기를 치운 무대,

그리고 관객들이 빠져 나간 자리를 보니 뭔가 허전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밀려드는 피곤함.. 아마도 긴장이 풀려서 그랬지 않았나 싶다.

의자에 쉬러 주저 앉았는데 다시 일어나기 싫을 정도로 피곤이 몰려드는

거다.. 악기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는데 웬지 귀찮은 생각만 들고

움직이기가 싫었다. 하지만 별 수 있나.. 하긴 해야 하는 일인데..

건장한(?) 남자들만 몇명이서 악기를 다른 성당으로 옮겨다 놓았다.

긴장이 풀린 심신, 피곤한 몸... 그러니 나는 정말 나의 색깔대로

조용해질 수 밖에... 

하지만 그런 나의 모습이 다른 친구들에게는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보였나

보다. 눈치를 보니 여엉 기분들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모 특별히 화날

일이 있었나?? 발표회를 끝내고 친구들의 얼굴에 가득하던 웃음이

달아난 것이 좀 아쉬워 보였다... 꼭 좀 잡고 있지...


친구들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은 나처럼 피곤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나의 우울증을 옮겨서 그런 걸까??



이 우울증... 이게 참 묘한 전염병이다. 사람 사이에 우울한 모습이 옮겨

다니는 것이... 한사람이 기운이 없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면 그 옆에

있는 사람도 같이 늘어지곤 한다. 마치 운동 경기에서 선수들의 사기문제와

같다고나 할까?

중세 유럽에 흑사병이 번졌을때에도 그 당시 유럽인구의 1/3이 죽었다고 

한다. 흑사병은 그렇게 빠르게 사람들 사이로 번져 나갔던 것이다.

전염병은 그렇다... 모르는 사이에 빨리 번져 나가고, 벌써 펴져나가면

어떻게 손쓸 겨를도 없는...

우울증도 분류하라면 이 일급 전염병에 넣고 싶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위로 펴져 가고, 또 어느새 나도 전염이 되니 말이다.

문뜩 그것을 깨닫고는 나는 속으로 다짐을 했다. 난 우울증 전염병 

소스(source)는 되지 않을꺼야... 하고..

하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을 보니 역시 무서운 전염병이긴 하나 보다.

그래서.... 나는 대신 다른 전염병의 소스가 되기로 했다...

바로 '행복'이라는 전염병의 소스가...

이 전염병은 확실이 우울 전염병보다는 확산 속도가 빠르다.. 

더구나 이건 걸리고 나면 약도 없다....  ^_^

어짜피 살아 가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옮기고 다닐 것이라면,

이런 멋진 전염병을 옮기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
이건 정말 일급 전염병이니까 말이다..






에에엥~~~ .... 0시 00분 현재, 작가의 마을에 행복이라는

전염병이 만연하고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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