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 (1990년)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부모님께서 매월 15만원을 생활비로 보내 주셨다. 그 15만원에는 한달 식비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학생 식당 매끼 식사가 800원이었는데 보통 아침은 건너 뛰게 되니 점심과 저녁을 학생 식당에서 해결하게 된다. 그런데 보통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생활을 하게 되다 보니 아침은 건너 뛰어도 야식을 건너 뛸 수는 없게 된다.
학생 식당이 있는 지곡회관 1층, 그 때는 일반식당이라고 불리우던 외부인들도 이용할 수 있는 식당이 있었다. 따로 이름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그냥 식당 이름이 “일반식당”이었다. 낮에는 학교 외부 손님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식당이었는데 메뉴 중에 1000원짜리 돈가스가 있었다. 매번 학생식당에서 밥 먹는 것이 지겨워질 때면 어쩌다 한번 그 식당에서 돈가스 저녁을 사 먹는 것이 그 당시 내가 부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치 중에 하나였다.
그 일반식당은 8시 30분 정도까지 일반 손님들을 받았고 마감을 한 후 저녁 9시부터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야식을 팔았다. 기억이 맞다면 메뉴는 라면과 쫄면, 그리고 군만두였다. 군만두 가격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라면은 300원, 쫄면은 500원이었다. 쫄면에 군만두를 같이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 있다는 걸 그 때 알았다. 200원만 더 주면 맛있는 쫄면을 먹을 수 있었는데 당시에는 그 200원 때문에 참 많이 주저주저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교내에는 은행이 없어서 지곡회관에 있던 우체국을 이용했어야 했다. 언제 ATM이 들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1, 2학년 때는 우체국에서 인출증을 쓰고 거기에 사인도 아닌 막도장을 찍어서 창구 직원에게 내고 돈을 찾았어야만 했다. 한달 생활비가 15만원이니 한번 찾을 때 기껏해야 만원, 2만원씩 찾았던 기억이 난다. 한번에 많이 찾아서 지갑에 두둑히 두고 쓰는 친구들도 있었던 반면 나는 보통 소액을 그 때 그 때 찾아 썼던 것 같다. 그래서 지갑에 큰 돈이 들어있지 않았고 주말에 친구들이랑 나갈 일이 있으면 급히 우체국에 뛰어 내려가 주말에 쓸 돈을 찾곤 했다.
지갑에 돈을 많이 들고 다니지 않는 버릇은 아직도 이어져 지금도 지갑에 보통 $10 혹은 $20 정도만 있을 뿐이고 한국에 있을 때도 만원 이상 잘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대부분은 크레딧 카드로 해결하다보니 현금 쓸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 마켓에서 $1도 안 되는 금액까지 크레딧 카드로 샀으니 점점 현금 사용이 줄어 들고 있긴 하다.
사실 지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가 중요했기 보다 통장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가 나에겐 더 중요했다. 약간 짠돌이 기질이 좀 있어 가급적 지갑엔 돈을 넣고 다니지 않고 통장에 계속 쌓아두곤 했는데 대학원생 때부터 서울에 있는 지금의 와이프를 만나려 가려면 차비가 제일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학교 안에서만 생활하니 크게 돈을 쓸 일이 많지 않았고 통장에 조금씩 쌓여 가는 걸 보며 이걸로 서울에 한번 더 갈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는게 그 때는 참 기분 좋은 일이었다.
2004년도 정도에 MBC에서 하던 프로그램 중에 “만원의 행복”이란 코너가 있었다. 난 하루에 만원을 가지고 생활하기였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인터넷으로 찾아 보니 무려 일주일동안 만원으로 생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15년 전 프로그램이니 일주일동안 만원으로 생활하는게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보통 이런 프로그램이 “보여주고” 싶은 것이 그러하듯 에피소드 내내 “훈훈한” 아니면 그렇게 연출된 장면들이 많이 생겨나게 된다. 돈은 부족한데 누군가 대신 한끼 식사를 사 준다거나 쫄쫄 굶고 대기실에 갔는데 옆에 있는 동료가 훈훈하게 김밥이라도 나누어 준다거나. 나누어 먹는 건 룰에 따라 그냥 안되니 되지도 않는 개인기 혹은 무슨 게임이라도 해서 나누어 먹는 장면들이 있었던 걸로 기억난다.
그런데 그게 무엇이 되었든지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 출연자들이 기억하는건 내 지갑에 얼마가 있었느냐가 아니라 그래서 그 동안 내 주위의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 왔는지를 깨닫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날 도와 주는 사람들, 잘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한테 신세진 것들을 기억해 주는 사람들, 그리고 문득 그것을 깨닫게 되는 내 자신.
그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내 지갑에 지금 얼마나 들었는지가 어쩌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보이는 통장, 그리고 보이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통장에 지금 얼마가 쌓여 있는지가 더 중요하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다. 주머니가, 그리고 지갑이 두둑하더라도 그게 사람 사이에 행복이 아니라 질투와 시기로 두둑하다면 그리 반갑지만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지금 지갑을 열고 거기에 세종대왕님과 신사임당님의 얼굴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장이라도 들어 있다면, 혹은 그 사람들의 오래된 메모 한 장이라도 들어 있다면 일주일 내내 지갑에 만원, $10 짜리 한장만 있더라도 조금은 행복할 것 같다.
행복의 가치가 지갑의 두께가 아니라 거기에 담고 있는 내용에 따라서 정해진다면 내 지갑은 정말 많은 것을 담아 낼 수 있도록 큼지막 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아내와의 추억 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다 커 버린 것 같은 아가씨 세 사람의 추억도 함께 담아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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