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둘째가 여름에 진학하게될 고등학교에서 parent night이 있어 아이와 함께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가 보았다. 둘째는 엊그제 중학교에서 단체로 견학을 왔었는데 자신이 고등학교에 가고 고등학생이 된다는 것이 설레고 신났는지 나와 함께 교정에 들어서는 순간 여기가 어디고 저기가 어디고를 나에게 자랑하듯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흔히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수업 끝나는 종소리에 맞추어 우르르 복도로 쏟아져 나오는 고등학생들을 볼 수 있는데 큰 아이가 San Jose/CA에서 졸업한 고등학교는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교실들이 여러 건물들로 나뉘어져 있어 그런 모습은 아니었다. 그런데 Austin/TX에 둘째가 가게 될 고등학교는 딱 그런 모습의 학교였다. 다시 말해 학교가 2층짜리 하나의 통짜의 건물이었다. 그리고 그 건물 안에 체육관까지 있다. 여기 여름 날씨, 그리고 최근의 겨울 날씨를 생각해 보면 학교가 하나의 건물이란게 이해가 되기도 했다.
Parent night 안내 중에 교과 과목에 대한 설명도 있었는데 큰 아이 때에도 참 다양한 교과 과정이 있었지만 둘째네 학교에서는 좀 더 다양한 과정들이 선택 과목으로 있었다. 특이하게 Drone, Animation, Video Production, Graphic Design, Journalism, Fashion Design 같은 선택 과목들도 있었다. 영어/수학/Social Study/Science를 제외하고는 매학년 이런 선택 과목들 중에서 듣고 싶은 것들을 골라 수업을 듣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그냥 대학생 수업과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둘째가 각 과목들을 설명하는 booth들을 돌아 다니며 궁금한 것들도 묻고 다니는 것을 보며 저 정도면 정말 고등학생이 되는게 걱정되는 것이 아닌 설레이는게 맞지 않을까 공감이 되기도 했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기는 1987년부터 89년까지였다. 그 고등학생 시절 3년을 돌이켜 보면 기억에 남는 것이 딱 두가지이다. 하나는 월요일 아침 조회 때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시간에 마이크가 고장났던 사건이었다. 그래서 다들 웅성웅성 잡담하기 시작했었는데 그 때 교장 선생님께서 단상 건너편으로 나오시더니 마이크 없이 큰 목소리로 훈화 말씀을 시작하셨다. 그 광경에 웅성웅성하던 소음은 잦아 들었고 말씀이 끝날 때즈음엔 어느 누구도 떠드는 사람없이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만 교정에 울리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의 그 카리스마 있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두번째 기억은 3년 내내 선생님들에게 맞았던 기억이다. 수업 시간이든지,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든지 떠들거나 성적이 떨어지거나 하면 툭하면 불려 나가 선생님께 맞았고 정말 어이 없었던 건 야간 자율학습 중에 술 마시고 학교로 되돌아 오신 선생님이 아이들 공부하는 자세가 못 마땅하다며 한참 공부 중인 애들을 불러내 때렸던 기억이다.
정말 그게 다였다. 나의 고등학생 추억이란 건.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이 어려웠던 건 선생님이라서가 아니라 들고 다니시던 몽둥이와 폭력이 무서웠던 것이고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 분들에게 무엇을 배웠는지 사실 하나도 모르겠다. 내가 대학 가기 위해서 알아야 했던 거의 모든 것들은 야간 자율학습이라는 시간 동안 푼 문제집과 정석 수학, 성문 종합영어에서 배웠던 걸로 기억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비록 반장이었지만 난 우리 반 아이들 이름 전체를 외우지도 못했고 모의 고사 시간에는 컨닝을 방지한다고 반 1등부터 꼴등까지 성적순대로 앉아서 시험을 보아야 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건 어쩌면 추억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나서 포항으로 내려가 10년 세월을 지낸 탓도 있지만 그 동안 종종 집에 올라 왔을 때 졸업한 고등학교를 다시 찾아가 볼 생각은 별로 해 보지도 않았다. 학위를 마치고 취업을 위해 다시 서울에 올라 왔을 때도 집이 그 고등학교 근처였기 때문에 걸어서 10여분 정도 거리였지만 그 사이에도 별로 학교에 대한 애정이 있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에 회사를 출근하는데 우리 집과 학교 중간 쯤 되는 곳에 있는 지하철역을 내려 가다가 우연히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10여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여전히 나를 기억해 주시는 선생님에게 놀라기는 했지만 한번 학교로 놀러 오라고 하시는 말씀에 일단 대답은 알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출근해야 한다며 얼른 자리를 피하던 나를 뒤에서 어떤 모습으로 바라 보셨을까.
미국으로 오기 전까지 거의 5년 정도를 그 동네에서 살았지만 결국 학교는 한번도 발걸음을 옮겨 보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옮겨 보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의 고등학생의 추억이란 그 두가지 뿐이었으니까.
둘째 네 학교를 둘러 보고 나오면서 둘째에게 묘한 부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도 저런 분위기에서 고등학생이었다면 내 인생의 3년은 더 많은 추억과 기억들로 가득차 있지 않았을까. 문뜩 내 인생에서 3년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끊어진 필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들떠 있는 둘째의 저 기분도 더 잘 이해해 줄 수 있을텐데 말이다.
종종 그렇게 그 때 그 시절, 무언가 사랑할만한 것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때가 있는 것 같다.
특히 텅 비어 버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그 시절이 내 인생 어딘가 있을 때는 더더욱 말이다
'작가의 마을 - 새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원의 행복 (0) | 2022.02.22 |
---|---|
K팝스타 vs 히든싱어 (0) | 2022.02.09 |
IRS에서 온 편지 (0) | 2022.01.31 |
Wishlist (0) | 2021.12.22 |
박카스 (0) | 2021.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