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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옛 수필

[관하여... 시리즈] 기다림에 관하여...

by 피터K 2021. 7. 31.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나에게 두가지 묘한 기분을 들게 만든다.

우선 하나는 나를 무척이나 초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기다리는 것을 별로 좋아 하지 않는다. 

괜히 짜증이 나기도 하고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특히나 연락을 하기로 했거나 아니면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오지 않을때면

말이다. 그럴때는 별의별 상상을 다 한다. 혹시 사고나 나지 않았을까...

삐삐라도 쳐 놓은 상태에서, '나에게 연락 좀 주렴...' 이라고 말을

남겨 놓았으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때도 있다.

왜 연락이 안 올까... 두어 글자 쓰고나서 한번 내 삐삐를 보고

또 프로그램 두어줄 짜고 나고 다시 한번 시계를 보고...

삐삐를 친 경우에는 가끔 전달이 안 된다거나 아니면 음성이 녹음이

안되는 경우도 있어 사람을 애태우게도 한다. 전에 한번 친구가

음성을 녹음해 놓고 전달이 안 되어서 그 다음날 우연히 들었던 경우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건 더구나 싸운 후에 친구가 내게 미안하다고

남겨 놓은 음성이었는데도 말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처음의 기분과는 조금 반대 되는 기분이지만,

은근히 즐기는 스릴(?)를 맛본다는 것이다. 

보통 나는 약속을 하고 나면 그 약속 시간 보다 조금 일찍 나가는 경향이

있다. 내 자신이 기다리는 것이 싫기 때문에 남들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이다. 한 5분정도 일찍 약속 장소에 가서 기다리는데

기다리면서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음... 만나서 무슨 이야기부터 할까?

그리고 이 친구는 무슨 옷을 입고 나올까??

음... 그런데 늦으면 어떻게 하지?? 으~~ 이 상상은 안 해!

중요한 만남일수록 그 짧은 5분간의 상상이 나를 무척이나 매혹시키고는

한다.



이 묘한 두가지 기분... 항상 두 가지중 하나만 택할 수 밖에 없지만

나는 그 기다림이 후자이기를 많이 바란다. 5분전쯤 약속 장소에 나가서

약간의 상상을 하면서 친구를 기다리고 그리고 약속 시간보다 5분정도

늦은 (이 정도는 봐 줄 수 있다... 후후...) 친구에게 한마디 따끔한

침도 놓으면서 환하게 웃는... 그런 기다림을...



지난 며칠은 정말로 많이 바빴다. 박사과정 입학 원서도 작성해서 넣어야

했고, 또 나의 실수로 수강 신청을 하지 못한 과목을 '사유서'와 교수님의

사인을 받아 수업학적과로 뛰어 다녀야 했고(이건 정말 조마조마 했다.

이 과목 때문에 난 졸업을 못 할뻔 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산학을 받기 위해 교수님 추천서와 아직 머릿속에 감도 잡히지 않은

석사과정 졸업 초록과 박사과정 연구 계획서까지 적어야 했으니까 말이다.

(후후.. 이번에 안 사실이지만, 논문은 공부하고 연구한 것을 적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논문은 5 퍼센트의 사실과 95 퍼센트의 소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다... )

그 몇가지 일이 오늘 끝이 났다. 그리고 노근해지는 기분...

풀리는 긴장이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긴장뒤에 떠오르는 얼굴...

못본지 꽤 된듯 싶었다. 지난 추석전에 보고 못 보았으니까...


난 그 친구에게 음성을 남겼다.

  [ 그냥... 보고 싶어서... 이따가 네 일과 끝나고 잠시 볼 수 있을까? ]


그러나 연락은 쉽게 오지 않았다. 

별로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의 긴 기다림은 다시 한번 시작이

된 것이다. 이번엔 어떤 기다림이었을까?

조금은 초조한 기다림이기도 했고 조금은 스릴있는 기다림이기도 했다.

연락이 없어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했던 기분은 씁쓸하기도 했다.

혹시나 바뻐서 음성 온 것을 못 듣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 음성은 녹음이 되지 않았을까...

그것도 아니면 삐삐가 전달이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또 다른 상상에 즐겁기도 했다. 

오랜만에 보는데 무슨 이야기를 할까...

아니면 일찍 끝나기라도 하면 바람이나 쐬러 가까운 바닷가나 가자고 할까..

음... 그것도 아니면 모처럼 저녁이나 함께 할까...

아니, 긴장도 풀렸는데 좀 치사하지만 졸라서 술이라도 마시러 가자고 그럴까...

별의별 생각이 나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9시가 다 되어서야 내게 다시 날아온 음성..

  [ 어쩌지.. 아직 일이 안 끝났거든... 오늘은 힘들꺼 같아...]


9시가 되어서야 나의 삐삐가 울렸을때는 이미 만나기는 어려울 꺼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래서 크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만큼,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힘들고 바쁘게 일하는 친구인데...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는 것은 솔직히 시인하지만...


하지만 내가 그 기다림동안 상상으로 그려오던 작은 멘트 한마디는

소용이 있게 생겼다.

나는 다시 그 친구에게 음성을 남겼다.

  [ 응... 바쁘면 할 수 없지.. 나중에 보면 되니까 말이야. 아마 보고 싶은

    그리움이 클수록 널 봤을때 기쁨도 크겠지.. 그때까지 그 그리움 잘 간직하고

    있을께... 대신 우리 오늘밤 꿈에서 만나지 않을래?

    그럼 열심히 하고 이따가 꿈에서 보자... 그럼 난 일찍 내려가 자야겠다... ]




오늘의 기다림은 나의 두번째 그리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