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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옛 수필

문을 열고 싶을 때...

by 피터K 2021. 6. 18.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서울에 갈 때마다 아니면 혹은 집에 전화를 걸 때마다 

여동생이 나에게 꼭 보라고 권해 주던 영화가 한편 있었다.

그건 바로 '비트'였다. 자긴 학교에서 보았다고 하는데 고3 애들을

모아 두고 보여 주었다는 건 학교가 그래도 좀 개방적이라고 그래야 

하는 건지 아니면 수능이 끝난 후 애들을 학교에 잡아 두어야만 하는

학교의 고충에서 나온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암튼 그 영화 '비트'가 왕가위 감독의 현란한 카메라 워킹을 

닮고 또 반항적인 이미지의 어떤 우상화처럼 그려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린 여동생에게는 참 신선하고 충격적인 영화였나 보다.

몇달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영화 '비트'를 못 봤다고 나를 구박하는

여동생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난 영화 '비트'보다는 만화 '비트'는 계속 보아 왔었다.

물론 만화 '비트'의 주인공들과 배경을 빌려온 것이 영화겠지만

내용에서는 참 많은 차이가 있는 걸로 안다. 우선 영화에서는 

남자 주인공(물론 이름 잊어 먹었음.. -_- )이 죽는 것 같던데

만화에서는 미국으로 간 로미를 마음 속의 여왕으로 남겨 둔 채

남자 주인공은 하숙하던 집의 딸과 결혼하여 아기도 낳고 길거리

자판으로 근근히 살아 가게 된다. 만화 '비트'는 3류 혹은 성인지라고

불리울 만한 그런 잡지에 연재가 되었던 것인데 그런 종류의 잡지

이면서도 계속 보았던 이유는 순전히 이 만화 '비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비트'를 좋아하게된 이유는 그 남자 주인공과 로미의 관계도 계속

궁금했고 또한 현란한 싸움의 장면도 어느 폭력 영화 못지 않게

대담하였지만 작가인 허영만씨의 어떤 글솜씨에도 매력이 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 허영만씨가 글까지 다 썼는지는 모르겠다. 문뜩 작가가 따로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

앞서 이야기 한대로 로미는 남자 주인공의 '여왕'이었다. 

로미가 미국에서 돌아와 남자 주인공을 찾았을 때 그리고 그 사랑하던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어떤 낯선 여인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사는 모습을 보았을 때 약간은 당황한, 그리고 어쩌면

자신에게 있어서 전부라고 생각한 어느 남자의 배신감을 느낀 것 같은

인상을 품기게 된다. 로미가 떠나 가려는 자리에서 남자 주인공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너는 나에게 있어서 여왕이라고... 늘 내가 숭배할 수 있고 내겐 

고귀하기만 한.. 그래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여왕이라고...

하지만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너를 떠나 보낸 건 네가 진정 

나에게 있어선 영원히 여왕이길 바래서 라고...

여왕은 여왕으로 남아 있을 때 그리고 닿을 수 없는 저 높은 곳에 있을 때

여왕이지 자신의 아내가 되어서 초라한 모습으로 살게 만드는 것은

더 이상 그 사람을 여왕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며, 그래서 널 

내 마음 속의 영원한 여왕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유치하기도 하고 어쩌면 그럴 듯한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 말고도 내게 더 의미있게 다가 오는 문구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남자와 여자에 대한 비유였다.

남자는 방이 아주 많은 성과 같은 것이란다. 

그 성의 각 방은 처음엔 비어 있다가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 오게 된다면 남자는 그 방을 그 여자에게 내어 준단다.

그리고 그 여자를 위해서 온갖 모든 것으로 방을 치장하게 된단다.

그러나 막상 그 여자와 헤어지게 된다면 남자는 그 방을 그대로

남겨 둔채로 문을 잠구어 버린단다. 또 다른 여자를 만나게 된다면

그 여자에겐 새로운 다른 빈 방을 열어 주게 된단다. 

그리고 가끔씩 잠구어 놓은 방문을 열어 보며 잊혀져만 가는

그래서 먼지가 하나 둘씩 쌓이기 시작하는 그런 방을 물끄러미

쳐다 본단다. 남자는 그래서 첫 사랑을 잊지 못한다고...

여자는 반면에 방이 하나 뿐인 성이란다. 

누군가 그 여자의 마음에 들어 오게 되면 여자는 그 하나의 방을

정성껏 정리하고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 준단다.

그러나 그 남자가 떠나게 되면 그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잊어 버린단다.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와 마음을 문을 다시 연다면 여자는 그 하나의

방을 다시 깨끗하게 정리하고 그를 그 방에 머물게 한단다. 

물론 그 방에는 전에 주인이던 남자의 그림자는 하나도 남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여자는 완전히 다른 남자에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 갈 수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여러 친구들에게 들려 주면 대부분이 그 이야기가 맞다고들

한다. 비단 남자뿐만이 아니라 여자 친구들도 그 말에 수긍을 한다.

물론 이 이야기로 남자와 여자 중에 어느 누가 낫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남자와 여자는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주위 사람들을 둘러 볼 때 이미 그 방이 차 있는 사람들도 있고

혹은 아직도 주인을 찾지 못하여 비어 있는 방들을 볼 때도 있다.

늘 사용하는 말이지만 '언젠간' 그들도 각자의 방에 어떤 주인들을

찾아 낼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 비어 버린 방들을 보며, 또 아직도 정리하지 못한 가구들과

장식에 배어 있는 떠나 버린 어떤 이의 체취를 맡으며 늘 아린 가슴을

쥐고 있는 친구들을 볼 때도 있다. 

떠나 버린 이에 대한 미련이 크면 클수록 상처를 받는 것은

내 자신뿐인지도 모른다. 


내 마음 속 방들의 문 열쇠는 어디다 두었을까?

문뜩 초라해 보이는 나의 성이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오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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