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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옛 수필

하얀 백지일 뿐인걸...

by 피터K 2021. 6. 18.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기억할 때 그 얼굴의 생김새 보다는 어떤 느낌이나

그 당시의 모습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또한 그 만남이 

자주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에는 나중에 그 사람의 얼굴 생김새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하나의 고정된 관념만이 남게 되기도 한다.

나와 같은 경우에는 통신이 아닌 오프라인으로 누군가를 만나본

경험은 참 적은 편이다. 지리상 위치도 그렇고 내 여건도 그렇고...

* 후후, 서류상 난 지금 군 복무 중이다. 신고 안 하고 함부로

실험실에서 뜨면 탈영이란다. ^^; *

때론 오프라인으로 누군가를 만난다는 걸 의도적으로 피하기도 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온라인 상으로 나를 알게 된

어떤 이들에겐 난 항상 '피터'로 남기 바라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를 오프라인으로 만나 본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는 

어떤 모습과 분위기라면 갸날픈 허리(-_-)와 늘 나의 손에 들려 있는

초록색 다이어리가 아닐까 상상해 본다. 다들 한번씩 '잊어 버리지

않니?' 하고 안부를 물어봐 주는 그 자그마한 다이어리 말이다.

다행이도 난 딱 한번 이 다이어리를 잊어 버린 적이 있었고, 그 땐

용케도 줏은 사람이 연락해서 가져다 준 적이 있었다. 그 이외에는

정말 손바닥만한 물건인데도 아직 잊어 버리지 않은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다이어리의 맨 앞 내용은 각 달의 계획을 적어 넣는 란이다.

오늘 무심결에 다이어리의 내용을 뒤지다가 5월이 시작된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직 4월에 클립이 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클립을 5월로 옮기면서 묘한 씁쓸함이 입가에 배어 나왔다.

그건, 5월엔 아무 것도 적혀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남들의 일을 잘 챙기는 편이라서 이 월 계획란은 늘 여러 가지

색깔의 글씨로 채워져 있곤 했다. 특히나 친구들의 생일은 말이다.

5월에 생일인 친구는 하나도 없나?


그러고 보니 예전엔 월 계획란을 참 충실히 적었던 기억이 난다. 

바로 작년에 사용하던 월 계획란을 보아도 거기엔 참 잡다한 내용이

많이 적혀 있다. 내가 서울에 갔었던 날부터 사소한 교수님과의

미팅 약속까지... 하지만 올해엔 대부분의 날들의 텅 비어 있고

새로 적어 넣은 나의 일과는 보이지 않는다. 아주 묘한 느낌이다.


한해가 다 가고 나면 새 월 계획란을 사서 하나 둘씩 작년의 일들을

옮겨 적는 것이 내가 가진 작은 행복 중에 하나였다. 그렇게 적어 

내려 가다 보면 한해 나의 삶의 모습을 어느 정도 뒤돌아 볼 수 있어서

기분이 참 좋았다. 하지만 올해는 왜 적어 넣은 내용이 하나도 

없는 걸일까? 아니, 왜 올해는 그렇게 이걸 귀찮아 했을까?


사람은 참 묘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서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기억하는 본능이 있는 모양이다. 내가 다이어리에 많은 빈칸들을

남겨 놓는 것은 아직 남기고 싶은 추억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많이 비었으니 많이 채워 넣어야지... 하는

생각보다는 많이 비었으니 조금 많이 허전하네... 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건 어떤 이유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올해 말, 다시 새 월 계획표를 다이어리에 넣고 있을 때

이런 생각을 떠올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까?

올해는 한 것이 하나도 없어, 그냥 하얀 백지일 뿐인걸....


시간을 접어 종이학처럼 만들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자그마한 병에 하나 둘씩 차근 차근 모을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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