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요즈음은 쌍둥이도 세대차이를 느낀다고 하는 말처럼 아주 작은 차이만
나더라도 환경과 사고 방식이 다름을 느끼고는 한다.
특히 나처럼 아주 어린 여동생이 있는 경우에는 말이다. 후후...
어제는 서울에 출장을 다녀 왔다. 평소같으면 일단 일이 끝나고 집에
들려 잠을 자고 나서 다음 날 아침에 내려 왔다. 그게 시간에 쫓기지도
않고 시간 상으로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제는
그렇게 집까지 갈 생각은 아니었다. 곧 추석이라서 집에 가게 될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게다가 교수님하고 같이 움직이려다 보니
집으로 빠진다는 것이 조금 눈치 보이는 일이기도 했고...
그치만 어젠 계획에 좀 어긋나서 집으로 들어 갈 수 밖에 없었다.
5시에는 연구소에서 나와야 공항에 갈 수 있는데 발표가 늦어 지고
작성한 프로그램을 깔아 주고 설명을 해 주다 보니 6시가 넘어 버린
것이다. 교수님은 오늘 수업이 있어서 할 수 없이 먼저 가시고
나만 남아서 일을 더 하다가 내려 왔다.
모처럼 집에 들어 간 셈인데 여동생은 고 3이라서 늦게 온다는 거다.
음... 잘 못하면 여동생 얼굴도 못 보고 가지 싶어 일부러
독서실로 전화를 했다. 오빠가 데리러 갈테니까 나와 있으라고 말이다.
덕분에 모처럼 여동생과 집까지 오는 거리를 함께 데이트 할 수 있었다. :)
물론, 여자 친구 없어서 자기와 함께 가는 오빠의 마음을 박!박!
긁은 여동생의 일침이 있긴 했지만.... T.T
그렇게 먹으면 엉덩이(음.. 그래도 이젠 숙녀인데...)가 펑퍼짐해 진다는
충고에도 불구하고 여동생은 라면을 끓여 먹겠단다. 그래서 나도
함께 늦은 야식을 먹게 되었다. 함께 라면을 먹으면서 오랜만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여동생이 갑자기 보여 줄 것이 있단다.
그러더니 옷장에서 옷을 한번 꺼낸다. 후후.. 근데 거기에 보니
온통 낙서가 되어 있었다. 자기네 교복 하복이라며 이제 마지막 입고
더 이상 입지 않을 옷에 이렇게 반 친구들끼리 기념 낙서를 했단다.
그 아이디어가 너무 멋있기도 했고,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역시 신세대란... :)
예전에 이와 비슷한 것으로 롤링 페이퍼(rolling paper)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자기네들의 마지막 옷인 교복에 다가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 여기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그게 유행처럼 번지자 학교에서는 좀 독한 선생님(어디나 그런 분은
다 계시는 모양이다. 후후..) 한 분이 단속을 했단다.
수업 시간 마다 돌아 다니면서 낙서한 사람들을 모두 불러 내어
벌을 주었다나... 근데 한 반에서는 선생님까지 가세 하여 한참
낙서 하고 있었는데 그만 벌컥 문이 열리더니 '낙서한 사람 다 나와!'
그러더란다. 후후.. 막 애들 교복에 낙서해 주고 계시던 선생님은
어쩔 줄 몰라 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 후후...
여동생은 옷 앞에 적힌 글을 보여 주며 이건 다른 반 선생님이
적어 주신거라고 자랑한다. 그런데 이걸 받으러 교무실까지 갔었는데
한참 그 선생님이 적어 주고 있는 동안 그 반 애들이 오더니
선생님에게 막 뭐라고 그러더란다. 알고 봤더니 그 선생님은
아침 조회 시간에 칠판에 다음과 같이 적어 놓고 나오셨단다.
'교복에 낙서 하지 말 것' 후후.. 근데 자신은 다른 반인 여동생의
교복에 낙서를 해 주고 있었으니.... :)
열심히 하라는 문구와 그리고 고 3인 때문인지 다들 이제 대학생이
되어서 만나자던 글이 많았던 여동생의 마지막 교복.
그것을 보면서 묘한 세대차이도 느끼게 되었고 그들 만이 가진
순수함이 부럽기도 했다. 한 때의 장난처럼 보이기도 했고
난장과 같던 그 어수선함이 잠시 머리 속에 떠오르긴 했지만
그래도 이제 잊혀지지 않을 소중한 선물 하나를 쥐어든
여동생의 얼굴이 참 밝게 보였다. 난 이거 노랗게 변색할 때까지
가지고 있겠구나 하고 농담을 건넸지만 언젠가 시간이 흘러 정말로
노랗게 변색된 그 교복을 나중에라도 꺼내 보면서 행복한 시절을
떠 올리게 될 여동생은 참 행복하겠지?
어느 덧 시간을 흘러 나도 곧 서른이라는 조금은 끔찍한 단어 앞에
서 있지만 그 동안 나는 어떤 것을 간직해 올 수 있었나 돌이켜 보게 된다.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만이 간직할 수 있는 어떤 타임 켑슐이 있다는 것은 뭔가 마음 한 구석에
보물을 쌓아 둔 것처럼 참 뿌듯하지나 않을까?
여동생이 가진 훌륭한 보물만큼 반짝이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시간이
더 흘러 가기 전에 무엇인가 기억될 만한 것들을 모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 시간이 흘러 그것들을 꺼내 볼 때
그래도 조금은 살만한 삶이었다는 흐뭇함을 얻기 바라면서 말이다.
그래서 가끔은 여동생이 부러워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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