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나는 연필(아니 샤프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보다는
세라믹 펜같은 잉크 펜으로 쓰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건 연필심은 하얀 종이에 쓰고 나서 손으로 문지르면 지저분하게
번지기 때문이고 또 구지 다른 이유를 들자면 이상하게
잉크 펜으로 쓴 글씨가 연필로 쓴 글씨보다 더 이쁘게 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연필로 쓰라는 말도 있듯이 연필로 쓸 때에는
잘못 쓴 글씨에 대해서는 지우개로 깨끗히 지울 수 있지만
잉크 펜의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천상 '화이트'라고 불리우는 또 다른 잉크(?)를 써야 한다.
항상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나는 그래서인지 누군가에게 줄 편지라든가
아니면 남겨야 하는 글씨에는 꼭 잉크 펜을 쓴다. 시험 보는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연필을 사용해야 하지만 웬지 수식을 푸느라고 지저분하고
어지러운 답안지를 낼 때면 어딘가 개운하지 못한 맛이 있다.
그래서 숙제를 해 내는 경우에는 이면지에 지저분하게 내 마음대로
풀고 나서 다시 종이에 새로이 옮겨 적기도 한다. 잉크 펜으로.. :)
이렇게 잉크 펜으로 글씨를 자주 쓰다 보니 가끔 실수를 하기도 한다.
잘못 쓰는 글자가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화이트를 사용하게
된다.
화이트... 오늘 문뜩 노트 필기를 하다가 틀린 글자를 지우고 나서
한참이나 그 화이트로 메꾸어진 흰 부분을 멍하니 쳐다 보았다.
틀린 글자 위에 마치 방금 내린 눈처럼 하얀 화이트를 보면서
옛 생각 하나가 어렴풋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내 친구 중에 나와 같은 성격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도 무척이나 깔끔한 것을 좋아 해서 내게 편지를 쓰거나 메모를
남길 때 틀린 글자가 있으면 화이트를 이용해 그 글자를 지우고는 했다.
한번은 그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았을 때 편지를 읽던 나는 편지 중간에
하얀 화이트로 칠해진 부분을 발견했다. 아마 틀린 글자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화이트를 보는 순간 묘한 궁금증이 나를 사로 잡았다.
그 화이트 밑에 숨겨진 글자는 무얼까?
후후.. 가만 생각해 보면 참 아무 것도 아닐텐데 그 때는 호기심이
나를 너무 유혹했었나 보다. 틀린 글자려니 하고 넘어 가면 될 것을
구지 그 안에 감추어진 글자를 보려 했으니 말이다.
처음에 내가 시도했던 방법은 불빛에 비추어 보는 것이었다.
얇게 화이트를 칠한 부분은 불빛에 비추어 보는 것만으로도 무슨 글자인지
알 수 가 있었다. 그러나 조금 두껍게 칠해진 부분은 아무리 불빛에
비추어 보아도 보이지가 않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포기할 피터는 아니다. :)
이번엔 아애 그 화이트를 없애 보기로 했다. 화이트가 칠해진 부분을
살짝 구기니 굳어진 화이트가 부서졌다. 그런게 한 조각 두 조각을 부수어
내어 결국 화이트를 다 뜯어 냈다.
후후.. 이렇게 고생(?)을 한 끝에 얻어낸 결과는 물론 잘 못 쓰여진 글자
몇개와 그만 문맥에 안 맞는 문장 몇 개였다.
날 좋아 한다든가 아님 사랑한다는가 하는 충격적인 고백은 역시
숨겨져 있지를 않았다... :P
그 때는 뭐가 그리도 궁금했는지 모르겠다. 화이트 조각 하나 하나를
뜯어낼 만큼 그다지 큰 비밀은 숨겨져 있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런 것을 보면 난 참으로 궁금한 것은 못 참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다.
궁금해지면 반드시 알아 내고야 말아야 하는 그런 성격.
하지만 언젠가 그 화이트 밑에 숨겨져 있는 작은 비밀을 알아낼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공상도 해 본다. 서로에게 말하기 부끄러워서
숨기고 있던 작은 비밀들을 그런 화이트 밑에 감추어 두고 언젠가
시간이 흘러 그 화이트가 떨어질 때 나의 진심을 알게 되겠지.. 하는
동화같은 소망으로 말이다.
네가 몹시도 그리워 잠시 너를 떠올려 봤다는 말과 함께 사랑한다는
말도 한마디 썼다가 화이트로 곱게 지워야 겠다.
큰 비밀은 아니지만 그런 것 하나 하나 숨기는 것도 뭔가 재미있는 일이
아닐까?? ^_^
그리고 언젠가 나도 모르게 또 화이트를 떼어내고 있을 때
숨겨둔 말 한마디,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찾아 냈으면 좋겠다.
이건 그냥 상상속의 공상으로만 남을까, 아니면 언젠가 정말 이루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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