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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테크의 추억

When I was young...

by 피터K 2021. 5. 30.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머릿말 : 자신의 어깨가 너무 무거워 지금 파란 하늘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96학번들을 위해...


내가 이 곳 뽀스떼끄 마을에 온지도 벌써 한 손가락으로는 셀 수 없는

햇수가 지났다. 1학년때의 철없는 모습으로부터 지금 박사 1년차

깡패(?)의 아저씨까지 난 참 묘하게 잘 지내온 것 같다.

친구들중에 가끔 이 학교를 무척 떠나고 싶어한 이들도 많았고

정말 석사 과정이 끝나자마자 떠나서 아직 연락도 없는 친구도 있다.

어이구 짜식들.. 연락이나 하지..

하지만 그 친구들 마음 속에는 늘 뽀스떼끄 마을이 남아 있지 않을까?


내가 이 마을에 오기로 했던 것은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였다.

고등학교 1학년때 선생님께서 종이에 자기가 지망하는 대학을 적어 

오라는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후후..) 난 아무 생각없이 '포항공대'라고

적었다. 그 당시에는 포항공대는 참 생소한 곳이었다. 이제 겨우

신입생을 받은 학교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뭔가 모를 묘한 신비감이

나를 유혹했다. '포항공대' 이름만 들어도 참 멋있지 않나?? :)

목표는 오직 포항공대였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말이다. 하다 못해 

고등학교 3학년때 독서실에 있으면서 학교의 사진을 오려 책상 앞에

붙여 놓기까지 했다. 난 저기 꼭 갈꺼야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다행이(?) 난 무사히 이 곳에 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새로운 생활들.

술, 담배, 그리고 미팅, 거기에 덧붙여진 과도한 숙제들.. ^^;

그러던 중 1학년 2학기때 문제가 하나 불거져 나왔다. 바로 학교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맞서는 총학의 반발. 총선이 있었더 해였는데 한 물리과

학생이 민자당을 반대하는 자보를 붙였고, 당시 민자당 대표였던

박 태준 이사장님을 신경 썼던 학교는 자보를 떼고 학생에게 경고를

내렸던 것이다. 물론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이런 문제로 학생에게

경고까지 주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로간의 원만한 대화로 잘

풀어 나가고 있었는데 사건 하나가 터진 것이다. 바로 학교가 91학년도

신입생 입학 원서에 소위 말하는 '서약서'를 집어 넣은 것이다.

공부이외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는 언급 불가였다. 상황이 안 좋았다.

가뜩이나 학교와 냉전 중이었는데 말이다. 각 학과 마다 비상 총회가

소집되고 이러한 학교의 억압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 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모아졌다. 결론은 기말 고사 거부. 아마도 이건 우리 학교 개교

사상 초유의 일일 것이다. 그리고 최초의 밤샘 집회. 

아직 아무 것도 모르던 1학년 새내기 나로써는 무척 많은 혼란을

겪었다.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아니면 내가 꿈꾸던 포항공대는

과연 이러한 것일까... 

시험 거부는 솔직히 내가 받아 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내 생각에는

학교에 뭔가 잘 못된 것을 수정하도록 요구 할 수 있지만 시험 거부라는

것은 학생으로서의 본분마저 내 팽개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는 옳바른 방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분위기는 대부분 시험 거부로 가고 있었다. 그러니 나조차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던 중, 아버지와 전화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늘 엄하신 분이었고

그래서 솔직히 학교의 상황을 이야기 해 드리면서 약간은 겁이 났다.

내 생각에 당연히 아버지는 시험거부는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하실테니

말이다. 하지만 가만히 듣고 계시던 아버지의 말씀은 전혀 나의 상상과는

달랐다. 

"시험 거부를 다 같이 하게 되면 하렴. 그건 단지 큰 강물이 흘러 가다가

잠시 만나는 소용돌이 뿐이란다. 너의 큰 물줄기는 그저 열심히 네 본분에

맞게 공부를 하는 것이지. 시험 거부를 하게 되더라도 너는 네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단다. 작은 소용돌이게 큰 물줄기는 흩어지지 않는 거란다."

솔직히 충격적인 아버님의 말씀이셨다. 시험 거부를 하게 되면 당당히

하라고 하시다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위치, 그리고 내가 해야할 역할들...

나의 결론은 시험을 보는 것이었다. 총학도 그렇게 나왔다.

시험 거부는 각자의 손에 맡긴다고.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라고..

물론 이것이 우리들의 힘을 학교에 보여 줄 수 없는 일면 패배의 

모습이었을지는 모르지만, 난 그것이 진정 과학도라고 하는 학생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성인이기

때문이었다. 


한 번의 큰 시련이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이 엉망이 되어가고 결국은 학교를 잘 못 택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나도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물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나의 대학 생활이란 도무지 그들의 대학 생활과는 맞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쯤 잘 못 택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우리의 대학 생활을 부러워 한다는 것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부러워 하는 것이다. 여기를 잘 못 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서울에 있는 어느 대학을 가더라도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런 고민은 대학생으로서 모두가 겪는

홍역같은 것이라는 거다.


대학생은 더 이상 누군가가 떠 먹여 주는 어린 아이가 아니다. 

눈에 목표가 보이지 않는다고 그리고 자신의 허둥대는 모습에  

무너지는 것은 어린 아이의 모습이다. 목표가 보이지 않으면

찾아라. 허둥대며 생활이 엉망이라면 스스로 바로 고쳐라.

이상의 눈은 누가 뜨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떠야 하는 것이다.


힘이 들면 무너져라. 거기서 배워야 한다. 

내가 왜 이럴까 하는 생각보다는 다시 해 보자는 생각이 오히려

사람을 일으킨다.




나에겐 친구가 참 많았다. 늘 마음을 함께 열 수 있는 친구가...

가끔 힘이 들어 무너지려고 할 때는 그 친구들이 함께 받쳐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도 내 친구의 버팀목이 되었고 말이다. 

이제는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튼튼한 뿌리가

생겼다고 믿는 나는 지금 96학번 새내기들의 힘 빠진 어께를 보면

웬지 미소만이 지어 진다. 후후.. 그 홍역을 다 앓고 나면

다들 어른이 될테니 말이다. 


저 녀석들 다 어른이 되어 버리면 징그러워서 어떻게 보나.. :)


내가 어렸을 때에는 나도 아마 힘들었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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