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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테크의 추억

어른이 된다는 것

by 피터K 2021. 5. 23.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대학원생에게는 따로 연구실 안에 책상이 제공된다.

하지만 나는 그 연구실 책상에서 공부하기보다는 일부러 도서관을 찾아

가는 편이다. 연구실이 공부하기에는 조금 어수선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도서관은 묘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서재가

놀이터였던 나는 책 냄새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정확히 무엇이라고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책이 쌓여 있는 곳이면

독특한 냄새가 난다. 서재방 속에 묻혀 이런 저런 책을 꺼내 보던 

기억때문인지 나에겐 그 냄새가 참 편안함을 가지게 해 준다.

도서관에 가면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나를 도서관으로 유혹하는

묘한 매력인 셈이다. 


예전에는 도서관 자리가 넉넉했지만 요즈음은 그 자리가 조금 모자른

편이다. 그래서 빈 자리를 찾으려면 2층부터 5층까지 다 둘러 보아야 한다.

하지만 도서관 서가 사이를 걷는 느낌은 마치 산림욕을 하는 기분으로

느껴져 빈 자리를 찾는 일이 귀찮지만은 않다. 겨우 빈 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커피부터 한 잔 마시러 간다. 내가 가진

일상의 작은 행복 중의 하나를 찾으러 말이다. :)


어느 날 문뜩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옆 자리 친구를 넘겨 보게 되었다.

숙제를 하고 있는지 계산기까지 두들겨 가며 무엇인가를 종이에 적어

내려 가고 있었다. 앞에 펴 놓은 책을 보니 1학년 필수 과목인 

calculus(미적분학)이었다. 학번도 몰래 훔쳐 보니 올해 신입생이었다.

후후.. 그런 모습 속에서 갑자기 옛날 피터의 모습이 아련히 비추어져

왔다. 나도 이럴 때가 있었지... 고등 학교를 막 졸업하고 사전을

찾아 가며 원서를 읽던 때가 말이지...

어느덧 6년의 세월은 훌쩍 지나가 버리고 나는 또 다른 모습으로

이렇게 신입생 옆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예전의 학부 1학년 때의 

기억도 가물가물한 것을 보니 6년이라는 세월이 참 길기는 긴 모양이다.


내가 1학년 때 우리 학교는 막 4학년까지 다 채워졌었다. 그 때 

동아리에 처음 들어가 만났던 선배들의 생각이 난다. 특히 88학번이던

당시 3학년 선배들이 말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1학년, 피터가 그들을

바라 보며 느꼈던 하나는 그들이 참 의젓하고 멋있다는 것이었다.

큰 형, 그리고 큰 누나라는 느낌이 너무나도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도 학년을 하나씩 쌓아 3학년이 되었고 새로운 신입생들을

맞이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1학년 후배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선배님은 너무 든든한 것 같아요'.

후후후, 이들도 그 때의 나와 똑같이 느끼고 있는 것일까? 지금 3학년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참 철없다고 느껴지는데 말이다. 물론 지금 내 모습도

여전히 어리다는 생각뿐이지만 말이다. 


도서관 옆 자리에서 calculus를 풀고 있는 이 이름 모를 후배는 이제 

박사 과정인 나를 어떤 눈으로 쳐다 볼까? 여전히 듬직하고 멋있는 

선배로 기억할까? 내가 내 자신을 바라 보는 눈은 여전히 어린데도

말이다. 후후후...

어른이 된다는 것이 갑자기 부담스러워진다. 

아마도 어느 날 훌쩍 커버린 나를 발견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날이 되면 남들에게 보이는 듬직함보다는 내 자신에게도 듬직한

나를 발견했으면 좋겠다. 


언제쯤 그런 날이 내게 찾아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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