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처음 대학원에 들어 왔을 때를 생각해 보자.
무척 오래된거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제 겨우 2년이 지났을 뿐인데.
아마도 그건 내가 이 학교에 7년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늘' 이 곳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 때는 '정열'이 있었다. 무엇이든지 해 보겠다는 정열이 말이다.
실험실에서 청소를 할 때도 제일 열심히 하려고 했고, 학기를 채 시작도
하지 않아서 맡겨진 프로젝트는 광양까지 출장을 다녀 오면서 그리고
냄새 나는 작은 방에서 밤새며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끝까지 해 내었고
일면 뿌듯함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짠 프로그램이, 프로그램 맨 머리맡에
'programmed by peter'라고 적은 프로그램이 광양 제철소 내에서 돌아
가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리고는 잠시 휴식...
몇 달 뒤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기고 나의 졸업 과제와도 상관이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또한 열심히 했다. 이것도 생각해 보면 그럭저럭
해내지 않았나 싶다. 후후.. 내 생각에 말이다.
하지만 석사를 끝내고 박사 과정을 시작한 올해부터는 웬지 슬럼프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책상에 앉아 논문과 책을 읽다 보면 머리가 굳어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마다 내 자신에 대해서 생각을 하곤 한다.
내가 과연 이 자리에 있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물음표.
한계를 느끼는 것이다. 난 과연 '박사'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솔직히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내 자신이 무척 초라하게 느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고 또한 내게 주어진 재능이라고는
정말 눈꼽만한 것밖에 되지를 않는데 이 모든 것, 내가 이 자리에 있게
되는 것은 단지 '운'이 좋았기 때문은 아닐까...
한계를 느끼게 될 때마다 나락에 떨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한정 어디론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유일하게 이런 기분을 떨치게 해 주는 것은 친구이다. 조금은 멀리 있어서
자주 얼굴은 볼 수 없지만 내게 많은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이.
언젠가 그 친구에게 말을 했듯이 그래도 내가 이렇게 견디어 나가고 있는
것은 네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때론 푸념을 털어 놓는다고
전화를 하다가 너무 오래 해서 '나 때문에 부담되지?'라고 말할 때는
피식 웃어 버리고는 말지만 그 친구가 내 마음을 조금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네가 있지 않았으면 난 아마도 벌써 무너져 버렸을지 모른다고...
너는 내가 지칠 때 도망가 쉴 수 있는 안식처라는 것을...
며칠동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기도 하고 피해 버리고도 싶다.
그렇지만 내가 있을 곳은 여기 이외에 다른 곳은 없다고 위안 삼아 본다.
고등 학교 때 무척 좋아 하던 구절처럼 내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가졌고 또한 어떤 재능이 주어졌던간에 내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하는 것 뿐임을 되세기면서 말이다.
나무는 제각기 있는 힘을 다하여
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펴며 살아 간다.
- 수필 '나무' 중에서.
나도 내 힘껏 가지를 펴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