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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옛 수필

시간이 준 선물

by 피터K 2021. 4. 11.

*!* 이 글은 1994년에서 97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온 집안 식구가 천주교를 믿는 우리집은 할머니 제사때가 되면

제사상을 차리는 대신 할머니의 유언대로 성당에 미사를 봉헌한다.

그러면 성당에서는 '연미사'라는 이름으로 그 미사를 돌아가신

영혼을 위해 바치는 것이다. 

지난 신정때, 언제나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성당에 할머니 연미사를

넣으셨다. 미사 시간은 저녁 8시... 그런지만 나는 오랜만에 서울을

가게 되서인지 만날 약속이 많았다. 그날도 오후 1시에 시내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고... 1시에 만나니까 충분히 8시까지는

돌아 올 수는 있다고 생각은 했다. 물론 집이 일산이라서 시내에서

들어 오는데 2시간 정도가 걸리기는 하지만...

친구를 만나서 늦은 점심을 함께 하고, 그동안 못 나누던 이야기를 

나누고.. 만난 시간이 일렀으니까 처음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렇게 카페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둘은 조금 지루해져서

어디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결국 나온 이야기가

'비디오방'.. 나는 비디오방을 한번도 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경희대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금 두리번 거린 후에 찾아

들어간 비디오방... 무엇을 볼까, 한참을 고른 후에 우리는 

메버릭을 골랐다. 런닝 타임은 2시간.. 그치만 내가 시계를 막 보았을때

벌써 시간은 4시 30분을 넘어 가고 있었다. 음.. 시간이 조금 모자르기는

하네... 2시간 짜리이면 끝이 나면 6시 30분... 그럼 일산까지 들어 가면

8시 미사 시간에 맞추기에는 조금 늦을꺼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리 늦지는 않을 꺼라는 생각이 들었고

별 망설임없이 메버릭을 보러 들어 갔다. 영화가 시작되고 우리 둘은

의자에 앉아 웃고, 때론 잡담도 나누며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3분의 2쯤 지나갔을때, 나는 시계를 보았다. 막 6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이거 일어나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테이프는 아직도 돌아 가고 있었고, 내가 일어 서면 내 친구도

일어서야 하기 때문에 차마 입으로 나 이제 일어나 가 봐야겠어..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눈은 영화속의 손놀림을 따라 가고만

있었다. 

내게 아무런 망설임이 생기지 않았다... 적어도 그때에는...

하지만 테이프가 다 돌아가고 비디오방을 나서면서, 내게 늦지 않았니?

하고 물어 보던 친구에게 괜찮아.. 라고 말은 했지만, 웬지 마음속

그 한구석이 편하지는 않았다.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괜시리 젖어드는 서글픔...

할머니라는 분은, 내게 있어서.. 어쩌면 그 친구와 만나 보낸 시간보다는

더 소중한 분이셨는데...


결국엔 미사시간에 한참이나 늦어서 막 퇴장 성가를 부르고 있을때에

겨우 들어 갈 수 있었다.. 

성당뒤에 앉아서 두 손을 가만히 모아 쥐며.. 난 생각했다.

할머니... 내가 항상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또 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분이었는데...


모든 가슴 아픈 일에는 시간이 약이라고들 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장 가슴 아파던 일도 차츰 기억에서 멀어져 가고...

그렇지만 잊고 싶은 일 이외에도 잊지 말아야겠다고 하는 일도 있다.

하지만 시간은 그것도 잊혀지게 만든 것일까? 

잊지 않겠다고 한 일까지도?


두손 모아 성당뒤에 앉아 멀어져 가는 할머니의 모습을 부여 잡으려

노력하면서.. 나는 할머니를 잃은 것이 아니라고 느끼게 되었다.

비록 시간은 나에게 할머니를 빼앗아 가려고 했지만, 

덕분에 나는 할머니가 내게 더욱 소중한 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 아니, 시간은 나에게 조금 더 좋은 기회를 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소중한 사람을 잊지 말라고...


두 손을 모은채로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나는 할머니의 평안을 잠시

기도 했다... 

            언제나 저와 함께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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