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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테크의 추억

의욕

by 피터K 2021. 4. 19.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금성일렉트론(이번에 LG 반도체로 바뀌었지 아마...) 신입 사원들이

학교로 연수를 받으러 왔었다. 4주동안 각 교수님들이 돌아 가시면서 

강의를 하셨는데 그 중에 마지막 주인 지난 주에 우리 교수님이 

VLSI Design을 맡아 강의하셨다. 항상 우리 교수님의 지론은 강의와 

병행된 철저한 실습이다. 그래서인지 강의와 함께 실습이 시작되었는데

그 실습이라는 것이 거진 지옥훈련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루 3시간 강의,

3시간 실습.. 그리고 그날 배운 툴로 그 다음날까지 내어야 하는

숙제... 그렇지만 이 숙제라는 것이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숙제를 다 하고

나면 대부분 새벽 3, 4시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녹초가 

되어 갔고, 거기에 조교를 맡은 우리 실험실 사람들은 덩달아 펴질 수

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주말이 다가 올수록 점점 하는 속도는 늦어져

목요일밤에 조교를 맡은 나는 다음날 아침 9시에 들어가 겨우 잘 수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나니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가뜩이나 주말엔 친구들과 주왕산에 가기로 했는데...


토요일 아침, 오랜만에 느즈막히 늦잠을 잔 후, 침대에서 일어났다.

더 자고 싶었지만 점심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른 씻고 나서 

약속장소인 도서관으로 올라갔다. 약속시간은 12시... 하지만 나와 약속한

후배는 그 약속을 잊어 버렸는지, 나타나지를 않는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12시 30분까지 기달렸지만 결국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은 속으로 화가 났다. 약간은 바람 맞았다는 기분이 들어서...

혼자 내려와 식사를 하고 방에 다시 들어와 누우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 

왔다. 일주일 동안 조교때문에 밤과 낮을 꺼꾸로 산 탓도 있었고, 

약속도 바람맞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은근히 산에 가기가 싫어

지는 것이었다. 그냥 방에서 더 자고, 저녁때 영화나 보러 나갈까.. 하고..

그렇게 방에 누워서 고민을 하고 있다가 나는 결국 몸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만일 내가 산에 가지 않으면 나는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깨고 말테니까... 아마, 그렇다면 내가 지금 바람맞아서 기분에 언짢듯이

그 친구들도 그렇겠지... 하며...


주왕산 가는 차안에서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 파카를 뒤집에 쓰고 

계속 잤다. 피곤한 탓도 있었고, 사실 난 화가 나면 원래 한없이 조용해

지는 사람이라서...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는 과로로 피곤해서 몸살인 것

같다고 핑계를 대었지만... 하지만 그런 기분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다.

또한 오래 가질 기분도 아니고... 다음 날 아침 개운한 마음으로 일어나서

산행을 맘껏 즐기기로 했다. 주왕산은,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거의

산책로 수준이다. 오르막도 별로 없고, 골을 따라서 산바람을 쐬며 

걷는 산림욕을 하기에 따악 알맞은 코스들...  우리 일행은 그 골을

따라 주왕산 저 안쪽에 내연동까지 들어갔다. 거기서 시를 쓰신다는

시인 한분과 함께, 그 분이 내어 놓으시는 차 한잔도 함께 하고... 

우리가 머무른 작은 비닐 하우스 카페(?)에는 좌우로 기념품들이

널려 있었다. 직접 나무로 깍아서 만드신 거라나... 그 선물을 보며

들은 생각... 그 후배 사다 줄까...


후후.. 하지만 사람은 참 이기적인 동물인가 보다... 아마 토요일 아침

그 후배가 나를 바람 맞히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그것을 바로 샀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망설이게 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글쎄다...

나도 모르게 그런 사소한 일까지 마음을 재면서 사는 것이 은근히

비참한 생각도 들기는 했지만...

내연동을 떠나 오면서 들어갈 때의 가뿐한 기분이 조금은 무거운 마음이

되어 버렸다. 



무슨 일이든지 하다 보면 '의욕'이라는 것이 항상 필요하게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해 주고 싶은 마음도 마찬가지일께다.

주고 싶은 마음만으로 줄 수 있다면 그만큼 행복한 일도 없겠다만은

사소한 일로 그 일에 싫증을 느끼게 되면 더 이상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의욕'이 상실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작은

실수 하나로...

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의욕의 상실이 없었으면 좋겠다. 오히려 그 후에

내가 그 작은 선물을 사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의욕'보담은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으면 좋겠다.

특히, 사람에게 작은 정을 나누고 싶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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