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을 표현할 때는 곧잘 이런 수식어가
붙고는 한다. 아마도 이런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지리적으로는 가까우면서도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이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우리의 사고 방식으로 말이다.
일본이 2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여 항복한 지 열흘 후 일본의 대 신문인
'요미우리호치(讀賣報知)'는 다음과 같은 사설을 실었다.
"우리들은, 마음 속에, 군사적 패배가 한 나라의 문화의 가치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군사적 패배는 하나의 전기(轉機)로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 국민이 참으로 사고를 세계로 뻗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위해서는 국가적 패배라는 막대한 희생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인의 사고를 왜곡한 일체의 비합리성은
솔직한 분석에 의해 제거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 패전을 냉엄한 사실로서
직시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내일의 일본 문화에
신뢰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의 행동 지침을 시도하다가 전쟁에서 패했고,
그게 잘 못 되었으니 오늘 부터는 하나의 평화적인 처세술을 실행해
보자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어지는 주장 하나는 이렇다.
"일본은 세계 각국 가운데서 존경 받는 나라여야 한다."
그네들은 참 오똑이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다.
이번 여정 중에 오사카에 머무르면서 고베에 다녀 올 수 있었다.
가이드를 하는 아주머니께서 왜 고베가 일정에 포함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셨다. 연수라고 하지만 거의 관광과 같은 수준이었던
우리의 여정을 생각해 볼 때 고베는 그다지 볼 만한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고베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무역항이다.
오사카에서 고베까지는 버스로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이다.
늘 상쾌한 느낌을 가지게 하는 고속 도로에 올라 모자라는 잠을
잠시 보충하고 나니 금새 고베에 도착하였다. 무역항이라는 말을
스스로 나타 내기라도 하는 듯 눈에 들어 오는 장면은 주위에
가득히 쌓여 산을 이룬 콘테이너 박스들이었다. 콘테이너 산맥을
따라 우리가 찾아 간 곳을 고베의 이인관이었다. 무역항답게 이곳은
옛부터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 이인관에 가면
세계 각국의 집들을 구경할 수 있다. 또한 일본 다른 지방과는 달리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종교까지 함께 들고 들어와 각 종교의 집합소(?)들도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에는 하나 밖에 없는 이슬람 사원도 여기 이인관
안에 위치한다.
*!* 이인관(異人館)은 하나의 건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각국의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를 뜻한다. *!*
성당과 그리스 정교회 교회도 있다. 이 곳은 일본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곳이라고 했다. 물론 옛날에 말이다. 외국 여행이 쉽지 않던
시절, 이 곳에 오면 마치 외국에 와 있는 듯한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 여행에 익숙해진 일본인들에게 이곳은 더 이상 환상의 장소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제는 관광 명소로서의 자리는 잃어 가고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비싼 물가를 반영하듯이 입장료도 무척 비쌌다.
*!* 이인관 내에 각 외국 건물들은 입장료를 내야 한다. *!*
이인관을 지나 우리가 향한 곳은 Port Island.(일본식 영어의 한 단면.
일본 사람들은 이 곳을 '포토 아일렌도'라도 부른다.)
이 곳은 섬이었던 곳을 매립하여 거대한 도시처럼 만든 곳이다.
여기에는 우리 나라 KOEX 같은 곳이 있는데 마침 우리가 갔을 때에는
오사카의 다이마루(大丸) 백화점에서 세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 30분 동안 그 곳 세일하는 풍경(?)을 돌아 보았는데
역시 쇼핑객들은 아주머니들이었다. 마치 시장 바닥같은 분위기에서도
너도 나도 양 팔에 가득 물건을 움켜 쥐고 쇼핑을 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엔화에 대한 감각이 없어서 얼마나 싼지는 몰랐지만
나중에 물건을 사느라 늦게 오신 가이드 아주머니(!) 말씀으로는
정가의 30% 정도 밖에 안 했다고 한다. 늦어서 우리가 찾도록 만들어서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시던 가이드 아주머니께서 연신 '얼마나
싸든지... 얼마나 싸든지...' 하며 연발하는 것을 보아서는 무척 싸긴
쌌던 모양이다.
그리고 우린 점심을 먹기 위해 다시 오사카로 발길을 돌렸다.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내가 왜 이 글의 맨 앞부분에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요미우리호치(讀賣報知)' 사설을 적었는지
궁금해 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이제부터 그 글을 먼저 적은
이유를 풀어 보고자 한다. 고베를 돌아 다니며 구경하고 본 감상 중에서
몇 해전 발생했던 고베 대지진의 모습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그 사설을
적은 이유이다.
고베 대지진은 한때 동남아의 무역 물동량에 영향을 줄 정도로 막강한
지진이었고, 그 여파로 고베는 거의 쑥밭에 가까울 정도였다고 한다.
아마도 무너진 고가 차도라든가 화염에 쌓여 있는 고베 시내를
티비 화면에서 볼 기회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찾았던
고베는 과연 지진이 강타했던 지역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본의 여타 다른 도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다 못해 금이 간 건물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정말로 오똑이 같은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그 폐허에서 일어난 그 모습은 패전에서 일어나 지금의 일본을 갖춘
힘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결코 쓰러지지 않을 듯한
거인의 모습 같았다.
아마도 내가 한국에서 혹은 미국에서 지진으로 파괴된 도시가 아주 깨끗하게
일어선 모습을 보았더라면 아주 대단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고베의 모습을 보고는 그런 느낌보다는 웬지 두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진정 거대한 힘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과연 어떠한 나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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