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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옛 수필

나에게서는 늘...

by 피터K 2021. 6. 18.

*!* 이 글은 1994년에서 97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내게 있어서 제일 반가운 소리는 '같이 저녁 먹자..'하고 연락해 주는

친구의 목소리이다. 다른 것보다 이제는 지겨워질대로 지겨워진 학생

식당 밥을 먹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비록 이런 유혹때문에 뜻하지

않는 지출이 많아지긴 하지만 특별히 다른 곳에 소비할 곳이 없으니

그다지 생활비가 부족하지는 않다.

친구와 저녁 약속을 하게 되면 나에게 차가 있다는 이유로 꼭 내가

차를 몰고 그 친구의 실험실 앞으로 달려 나가야 한다. 예전엔

꼭 시간을 지키던 이 친구도 한두번씩 내가 달려 가는 것에 익숙해

졌는지 어떨 땐 내가 그 앞에서 30분이나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

물론 매일 그렇게 지각하는 건 아니니까 용서해 주기로 한다. :)


오늘도 방에서 티비를 보며 늘어진 토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는데

저녁 먹으러 가자고 연락이 왔다. 후후.. 간만에 연락온거 봐서

그동안 늘 같이 놀러 다니던 실험실 여자 후배들이 다 집에 간 모양이었다.

차가 학교 위 실험실에 있었기 때문에 그 험한 길을 건너 차를 이끌고

친구의 실험실 앞으로 갔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10분쯤은 늦을 줄

알고 아애 차를 한적한 곳에 대고 시디에 듣고 싶은 음악을 틀어 두었다.

그러다가 문뜩 눈에 들어온 한가지.... 

조수석 쪽 햇빛 가리개에 꼽혀 있는 방향제에 눈길이 머물렀다.

차 안에 향기를 내기 위해 슈퍼에서 흔히 파는 방향제였다. 이름이

그래이드였던가... 차에 꼽아 두기 위해서 클립이 하나 있었고 

그 클립 안에 향기를 내는 방향제를 넣어 두게 되어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새걸로 갈아 넣은지가 꽤나 되는 듯 했다.

조심스럽게 안에 있는 방향제를 꺼내 보았다. 이제는 그 향을 다 한 듯

처음엔 고체와 액체 비슷한 물질로 채워져 있던 방향제가 딱딱한

몇개의 고체 덩어리로 남아 있었다. 살며시 손톱 끝으로 눌러 보니

바스락 바스락 부셔졌다. 

혹시나 싶어 코 가까이에 살짝 가져다 대어 보니 약하지만 예전의

푸른 향내가 났다. 처음 방향제를 뜯었을 때 진하던 향과는 달리

은은하고 편안한 향내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방향제의 케이스에는 약 한달쯤 그 향이

간다고 적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한달이 지나고 나면 다시 

차 안에 향을 가득 채우기 위해 새것을 갈아 끼워야 한다. 

그 방향제의 향기는 한달동안만 유효한 것인가 보다. 그 자신만의

독특한 향내는...


사람도, 어떤 향내로 구분 지을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그 나름대로의

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늘 은은함을 내뿜는 사람,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른 사람의 웃음을 자아 내게 만드는 사람,

그리고 수다스럽지만 정작 그 안에는 뭔가 모를 슬픔의 향내를

감추고 있는 사람....

어쩌면 그 사람의 성품에서 품겨져 나오는 향내일지도 모르겠다.

왠지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면 그만의 독특함을 맡을 수 있으니

말이다.


내겐 어떤 향내가 날까? 조금은 편안하고 부드러운 향기를 뿜어 내고

싶지만 그건 사람의 생각대로 쉽게 되지는 않는가 보다. 그리고

사람마다 좋아 하는 향이 따로 있기도 하고...


차에 걸린 방향제는 내가 원하는 어떤 향기를 고를 수 있지만

사람에게서 나는 어떤 향기는 그렇게 고를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같은 향내라도 맡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기도 한 것일까?

내게 어떤 향내가 나는지 난 잘 모르지만 다만 그 어떤 편안함의

향내가 늘 품겨져 나왔으면 좋겠다. 

내가 어느 날 상처를 받았을 때 그리고 또 어떤 아픔에 슬퍼할 때도

그 향이 달라지지 않게 말이다. 

그렇게... 난 내 모습으로 남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서는 늘, 그런 향기가 베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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