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994년에서 97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매일 아침 실험실에 올라와 이 자리에 앉고 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메일 확인이다. 유닉스를, 그리고 X-windows를 사용하는 사람은 알겠지만
xbiff란 묘한 프로그램 하나가 나를 위한 메일이 도착했는지 아닌지를
미리 알려 준다. 예전에도 언젠가 한번 말했듯이 외국에서 사용하는
문 앞의 작은 우체통처럼 생긴 그림이 메일이 도착했을 때 '삑~' 소리를
내며 깃발이 올라 가는 것이다.
자주 메일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매일 아침 나를 기다리는 메일은
반드시 한통이 있다. 그건 바로 지난 밤 나의 디렉토리를 성공적으로
백업 받았다는 rdist의 메일이다. 후후...
그래서 인지 아침에 자리에 앉아 화면을 쳐다 보면 꼭 xbiff의 깃발이
올라가 있다. 그 때마다 잠시 생각해 보곤 한다. 백업 메일 말고 다른
메일이 와 있지나 않을까? 약간의 기대를 가져 보고 메일 확인을 해 본다.
하지만 대부분 백업 메일만이 나를 반기곤 한다. 그렇지만 그 잠시의
순간이 왠지 즐거운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오늘은 일을 하는 도중에 그 깃발이 높이 솟았다. 그 '삑~'하는 소리와
함께 말이다. 음... 이건 백업 메일은 아니다. 백업이 돌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다. 메일 확인을 해 보았더니 아는 사람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예전에나 지금이나, 그리고 손으로 쓴 편지이거나
아니면 이렇게 도착하는 메일이거나 그 짧은 소식이 반가운건
늘 무언가가 그리웠다는 뜻일까? 후후... 암튼 그런 감상은 잠시 접어 두고
메일을 읽어 보았다.
어, 그런데 이 메일이 조금 이상했다. 내용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글쎄다. 가끔은 한글 인코딩이 잘 못되어 글씨가 깨어져 버린 메일이
오긴 하지만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은 메일은 별로 보지 못했던거 같다.
그렇게 텅 비어 버린 메일을 보며 한동안 하얀 화면을 쳐다 보았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을까? 음.. 아니면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올랐다. 가까운 친구가 커피라도 한잔
하며 여유를 가져 보자고 적으려 했을까? 음, 그것도 아니면 어떤
충격적인 고백이나 폭탄 선언이라도 적었다가 다 지워 버리고 그냥
보냈을까? 후후후...
별로 크지도 않은 하얀 화면의 백지 위에 난 참 여러 가지 생각을
떠 올리며 나 혼자 그 내용을 적어 보고 있었나 보다. 늘 그렇듯이
나 혼자만의 여러가지 상상에 빠져서 말이다. :)
그런 상상도 잠시, 내 멋대로 적어 버린 빈 메일의 내용을 하나 둘씩
지우개로 지워 나가고 있는 순간 다시 그 사람에게서 메일이 도착했다.
긴 메일을 썼었는데 그만 메일 프로그램이 죽어 버리네요... 라고
시작된 메일이 말이다. 새로 적어 보낸 메일의 내용은 내가 기대하던
그런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사이 잠시 난 별의별
생각을 다 떠올려 봤다는건 솔직히 고백해 본다. 그리고 그 잠시의
순간이 왠지 즐거웠다는 것도... :)
어쩌면 시스템의 오류이었을지도 모르고 메일 쓴 사람의 순간적인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내게 하얀 백지의 메일이 도착했던건 말이다.
하지만 그게 누구의 잘못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날 그렇게 잠시의
여유로 초대해 주었다는 건 짓꿋은 어느 누군가의 장난은 아니었을까?
피터, 너 요즈음 많이 힘들지? 네가 즐겨하는 상상의
나래를 펴며 잠시만 손을 놓고 크게 기지개를 펴 봐. 이젠 좀
개운하지 않니?
내게 주어진 그 5분간의 여유가 마치 한 여름밤의 길고 긴 꿈을 꾼건만
같고 나를 잠시 상상의 나라로 초대해 준건 내가 아직 어릴 적 작은
소망들을 잊지 않고 있음을 일깨워 주는 것만 같다.
그 하얀 백지 위에 나 혼자 적어 보았던 그 많은 것들이 아직도
내 안에 숨쉬며 같이 살아 있음을 가만히 느껴 본다.
가슴에서 들려 오는 그 두근 두근 거림은 언제든지 자기들을 깨워 달라는
내 소망들의 작은 몸부림들은 아닐까?
그들의 이야기처럼 그리고 어느 누군가 의도했던 그 장난처럼 잠시 손을
내려 놓고 길게 기지개를 펴 보아야 겠다.
이야, 참 개운한 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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