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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을 - 옛 수필

작은 무도회

by 피터K 2021. 6. 18.

*!* 이 글은 1994년에서 97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비가 왔습니다. 차를 몰고 상쾌한 기분으로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말입니다. 차창을 도도독 두드리는 빗방울을 보며

잠시 걱정을 했죠. 음, 비가 내리면 안 되는데 말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죠. 정말이지 너무나 오랜 만에 야외로 놀러를 나가는

참인데 비가 오다니요.

하지만 다행히도 목적지에 도착을 했을 때에는 비가 그쳐 있었고

하늘은 맑았답니다. 아주 화창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따가운 햇살이

아니라 숨을 듯 드러 낼 듯 하는 태양의 숨바꼭질이 더 좋았지요.

그리고 가끔씩 불어 오는 상쾌한 바람이 더 기분을 맑게 해 주었답니다.

여기가 어딘지 궁금하시겠죠? 후후.. 여긴 에버랜드랍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오랜 만이었어요. 기억을 하나씩 더듬어 보면

내가 마지막으로 여기 왔던 건 이름이 아직도 용인 자연 농원이었던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답니다. 보이 스카웃에서 야영을 왔던 것이

마지막이었죠. 그리곤 한번도 찾아 오지를 못했답니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겁니다. 에버랜드에 그토록 와 보고 싶었던

이유는 말이에요.

모처럼의 휴가였습니다. 4주간의 군사 훈련을 마치고 나서 아직도

밤송이 마냥 자기 멋대로 솟아나 있는 짧은 머리를 그냥 모자 하나로

가리고 나서 에버랜드로 향할 수 있었던 건 나의 휴가의 멋진 계획 중의

하나였지요. 마침 차도 서울에 있었거든요. 후후...


너무나 많이 달라졌더군요. 놀이 시설하며 건물들의 위치하며...

내가 예전에 기억하고 있던, 그 땐 나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커다란

유령의 집은 어디론가 정말 유령처럼 사라져 버렸고 현대식의 말끔한

건물들과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끌어 내는 여러 가지 놀이 기구들이 

늘어져 있었답니다. 후후.. 갑자기 어린 아이로 돌아 간 느낌었답니다.

독수리 요새란 롤러 코스터에 매달려 마음껏 소리도 질러 보고

콜럼버스란 바이킹에 앉아선 땅으로 꺼질 듯한 짜릿함도 맛 보고

말입니다. 그리고 싸파리에선 길게 늘어진 사자와 호랑이들의 

유유자적함도 구경할 수 있었죠. 후후.. 이렇게 이야기 하니 정말

어린 아이가 되어 버린 것 같죠? :)


그 많던 놀이 기구들과 구경 거리 중에서 나의 마음을 사로 잡던

하나가 있었답니다. 그건 짜릿한 흥분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니었고

어떤 신기한 구경 거리도 아니었지요. 후후.. 그건 바로 에버랜드

한켠에 마련된 장미의 정원이었답니다.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열주 기둥들의 좌, 우로 수많은 장미들이

서로의 자태를 뽐내며 화려한 무도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듣는 장미의 이름도 있었고 낯익은 이름들도 있었답니다.

후후.. 하지만 솔직히 난 구별이 잘 가지 않더군요. 다 그 장미가

그 장미처럼 보였으니까 말이에요. 장미들의 지금 이런 나의 평을

듣는다면 무척 화를 낼지도 모르겠군요. 하하, 그래서 그 때 난 그들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못하고 그저 참 아름다워요 라는 칭찬만 늘어 놓고는

얼른 그들과의 대화에서 도망쳐 나왔는지도 모르겠네요. 후후...


그 장미의 정원 중 한 켠은 '미로(Maze)의 정원'이란 이름의 붙어 

있었답니다. 마치 미로처럼 벽을 세워 두고 그 사이 사이를 장미로

벽걸이를 만들어 둔 곳이었지요. 아주 복잡한 미로처럼 어지럽지는

않았지만 그 사이 사이로 숨겨진 작은 공간들이 연인들의 작은 속삭임

장소가 되고 있는 것 같았답니다.

그래요, 사실 오늘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거랍니다. 바로 그 '미로의

정원'에서 나도 모르게 살짝 훔쳐 보게 된 어떤 이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음악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요 그건 바로 나탈리 콜의

'I love you for sentimental reason(s)'이었죠. 왜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 말입니다, "I~~~ love you~~~~" 후후..

장미의 정원 전체를 휘어 감으면서 가로등 중간 중간에 달린 

스피커에서 이 음악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죠. 물론 그 음악의 선율은

장미들의 넝쿨을 따라 '미로의 정원'의 그 깊숙한 곳까지 스며 들었답니다.

마침 난 그 때 그 '미로의 정원' 안에서 헤매고 있던 참이랍니다.

노래 소리에 잠시 취해 코너를 돌았을 때 조금 멀리 떨어진 어느

공간에서 바로 그 두 사람을 보게 되었죠. 

남자가 정중히 여자에게 무릎을 꿇어 인사를 하고 여자에게 춤을

청했답니다. 여자는 수줍은 듯이 남자가 내밀은 손을 잡고 둘은

가만히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지요. 온통 장미로 둘러

쌓인 '미로의 정원' 그 한 공간에서 말입니다.

비록 두 사람의 움직임은 세련된 멋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무도회 마냥 연미복으로 잘 차려 입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둘은 가만히 그 음악 소리에 맞추어 가만히 가만히 한쪽 방향으로

돌고 있었답니다.

후후... 난 몰래 그들의 모습을 숨어 보았답니다. 어스름이 내려

하나 둘씩 켜지는 가로등과 함께 장미들이 꽃봉오리는 모두 그 둘만의

무도회를 기켜 보고 있었죠. 그리고 난 그들의 얼굴에 묻어 나는

행복을 읽을 수 있었답니다.


두 사람은 알고 있었을까요? 누군가가 자신들의 작은 무도회를 지켜 보고

있었다는 걸. 후후.. 하지만 설사 그걸 알았더라도 두 사람은 그 무도회를

끝내지 않았을꺼란 생각을 해 봅니다.

영화에서처럼, 아니 그 어느 영화의 한장면 보다 그 무도회는 너무나

아름다웠고 두 사람에게 소중해 보였으니까 말입니다.

가끔은 나도 어떤 음악을 골라 보곤 합니다. 후후.. 누군가를 

무도회에 초대해 보려고 말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두 사람의 무도회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음악이 끝나기 전 몰래 그 자리를 피하면서 마음 속으로 빌어 보았습니다.

지금 그 행복한 모습 그대로 그들의 앞으로도 그렇게 영원히 행복하기를

말입니다. 난 비록 그 마법을 이룰 어떤 주문이나 기적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아름다웠던 춤을 구경하고 있던 그 장미들은

혹시나 그런 마법을 알고 있지나 않을까요.



아직도 가끔씩 마음 속에 그 환한 장면이 떠오르곤 한답니다.

노란 수은등 아래에서 음악에 맞추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어색한 무도회를 열던 그 두 사람의 모습이 말입니다.

그리고 닮고만 싶은 그 행복한 미소도 함께 말이죠......




ps: 이 글은 당신을 위한 글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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