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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한국 여행 2026년 5월

한국 여행기 - 둘째날 고모와의 하루

by 피터K 2026. 9. 13.

교포를 위한 종합 건강 검진

 

미국의 의료비가 어마무시하다는 건 이제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죽하면 의료보험이 무서워서 은퇴를 못 한다는 이야기가 있을까. 2025년 기준 개인이 파산하는 가장 큰 이유 1위가 의료비란다. 의사 한번 만나면 그냥 기본적으로 $150은 청구된다. 그래서 열이 나더라도 일단 약국에서 타이레놀/애드빌 같은 해열제를 먹고 2-3일을 지켜 본다. 그래도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 때서야 병원을 찾게 된다. 지난 3월 대장 내시경을 받은 적이 있다. 만 50세가 넘으면 3-5년 간격으로 대장 내시경을 받을 수 있다. 의료 보험이 있는 경우 전액 보험사에서 커버해 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전액 본인 부담이다. 그렇게 보험사에서 커버해 준 대장 내시경 비용은 $1,928 이었다.

 

대장 내시경은 마취도 필요하기 때문에 시설과 인력이 갖추어진 수술센터, Cedar Park Surgery에서 진행한다. 검진 후 그곳에서 처음 청구한 의료비는 무려 $9,225. 이 금액이 의료보험 회사에 보내지면 정해진 의료 수가에 따라 $1,928로 낮추어지고 그 금액을 보험회사가 지급한다. 의료 보험이 없다면 그냥 이 청구 금액, $9,225 전부를 내거나 병원과 직접 네고를 해야 한다. 이 정도이니 그냥 한국가서 검진 받고 온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https://peterk.tistory.com/324

 

의료 기관 방문 하기 - 하나

"속이 조금 매스껍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며 종종 어께가 욱씬욱씬 쑤십니다." 병원에 갔을 때 이렇게 의사에게 이야기 하고 싶지만 파란 눈동자의 백인 의사를 보고 있노라면 먼저 한숨부터

peterk.tistory.com

 

그러다 보니 병원 가기가, 의사 한번 보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사정이 잘 알려져서 그런지 한국의 병원에서 조금은 독특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소위 재외교포를 위한 종합 검진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대장/위 내시경, 복부 초음파, 피검사/소변검사 등등 모든 걸 다 포함하고 검사 결과를 가지고 해당 전문의와 상담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가격은 145만원, 당시 환율로 $960 정도. 미국에서 대장 내시경 한번 받는 금액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내시경 검사를 위해서 근처 호텔에서의 하루 숙박도 포함한다. 

 

이 프로그램은 7년 전 한국에 방문했을 때 아내가 한국 방문을 준비하다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에 나와 아내 둘 다 검진을 받았더랬다. 올해는 내가 시간이 안 되기도 하고 지난 3월에 대장 내시경을 받았기 때문에 이번엔 아내만 신청을 했다. 여성의 경우 부인과 검진도 포함되어 있어 아내에게는 기회가 있을 때 하는 것이 좋았다. 미국에서는 이런 부인과 검진도 예약을 하려면 몇달이 걸린다.

 

종합 검진을 받을 수 있는 여러 병원이 있지만 우리는 비교적 종합 병원으로 알려진 신림역 근처의 양지 병원을 선택했다. 7년 전에 검사를 받을 때도 그 양지 병원이었고 부인과가 따로 있다는 점이 선택의 이유였다. 오후 1시까지 병원에 가야 했기 때문에 집에서 일찍 아침을 먹고 아내를 일산 대화역까지 데려다 주었다. 내일 점심 때쯤 모든 검사가 끝난다고 하니 내일 용인에 있는 처가집으로 내려가면서 픽업해 가기로 약속했다.

 

어머니가 간단하게(?) 준비해 주신 아침 식사. 첫날 케더링 후 남은 반찬과 함께 오랜만의 어머니표 떡국을 먹었다.

 

 

고모(여동생)과 아이들

 

아내는 그렇게 건강 검진을 받으러 떠났고 아이들은 오늘 하루 고모, 내 여동생과 하루를 보내게 된다. 조카들에게 뭐라도 하나 해 주고 싶어서 오늘 점심 전에 아이들을 데리러 온다고 한다. 마침 매제가 이직을 하는 중이라 며칠 쉬는 날이 있어 함께 온다고 한다.

 

아이들이 안경도 새로 맞추어야 한다고 해서 애들을 데리고 자기네 집 근처 스타필드에서 시간을 보낼 거라고 한다. 점심으로 무얼 먹고 싶은지 정해 놓으라고 연락이 왔다. 

 

여동생네는 온 가족, 매제와 여동생, 그리고 조카까지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 열열팬이다. 시간이 되면 셋이서 대구나 다른 도시 원정 구경까지 다닌다. 어떻게 보면 가족 여행도 하고 좋은 취미 생활인 것 같다.

 

사실 난 "스타필드"라는 말을 이번에 처음 들었다. 미국에서도 이런 규모의 대형 쇼핑몰이 있기는 해서 특이한 구경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상점의 구성이라든가 미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상품들이 있어 아이들에게는 좋은 구경이었던 것 같다. 다른 것보다 아이들이 고모, 고모부랑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아이들만 보내고 나서 무얼하고 보냈는지는 나중에 이야기를 들은 것도 있지만 아이들이 찍어온 사진들을 공유하면서 좀 더 잘 알게 되었다. 큰 아이는 한국에서 태어나 4살까지 살았기 때문에 여동생은 큰 아이에 대한 추억과 기억이 꽤나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런 추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오게 되면 조카들, 특히 큰 아이와는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미국으로 가기 전 4살때까지 고모인 자기가 같이 데리고 놀던 아이가 이제는 다 큰 어른이 되어 왔으니 놀랍기도 반갑기도 했을 것이다. 

 

나중에 미국으로 돌아 가기 전에 여동생으로부터 카톡으로 메세지가 왔다. 아이들이 한국말 잊지 않고 말할 수 있고 알아 들을 수 있게 도와 주어서 너무 고마웠다고. 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가까운 친척/핏줄이라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으면 가까워 질 수가 없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열심히 한글학교 데리고 다닌 것과 그래도 가급적 집에서 한국말로 대화할 수 있게 한 것이지만 사실 제일 노력을 많이 한 건 아이들이다. 식사 때마다 잘 알아 듣지 못하는 한국 방송 보면서 재미 없고 이해도 잘 안 되었을텐데 그래도 계속 들으며 익숙해지고 어느 정도 표현을 할 수 있다는게 다행일 뿐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이와 함께 미국에 온 사람들이 첫 몇달 동안 고민하는게 아이들이 영어를 잘 못하는데 학교에 가서 어떻게 적응할지 걱정이라는 것과 영어를 어떻게 빨리 배울 수 있냐는 것이다. 그러면 대부분 이렇게 말을 한다. 영어를 빨리 배워야 하는 걸 걱정하지 말고 한국말을 빨리 잊어 버리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라고. 정말 특이하게도 한 6개월만 지나도 아이들은 정말 빨리 영어를 배운다. 그리고 한번 그렇게 익숙해지면 한국말을 금방 잊어 버린다. 집에서 따로 한국말을 잘 사용하지 않으면 고등학생만 되어도 알아 듣는 것만 겨우 가능하고 한국말은 거의 하지 못하는 수준이 된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된다. 예전에 다큐멘터리에서 10대 후반에 일본군에 끌려와 동남아 오지에서 남은 평생을 사시게 된 할머니의 이야기가 방영 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분, 60년쯤 지나고 나니 한국말을 잊어 버리셨다. 실제로 그렇게 된다.

 

큰 쇼핑몰이 좋은 점은 보통 이런 푸드코트가 있어 먹고 싶은 걸 골라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 쇼핑몰 푸드코트에서는 대부분 일회용 용기에 담아 주는데 여기에서는 그래도 정식 식기에 담아 나온다.

 

 

왠만해서는 보기 힘든 두께의 치즈 돈가스. 아무리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어도 종종 저런 한국식 돈가스가 생각나곤 한다.

 

한국에 오기 전에 아이들이 모두 검안의를 찾아가 안경 렌즈에 대한 처방전을 받아 왔다. 미국에서는 다양한 안경테를 구하기가 힘들고 맘에 드는 안경테를 찾더라도 렌즈와 함께 주문하면 보통 2-3주가 걸린다. 최근에서는 한국식처럼 다양한 렌즈를 미리 구비해 놓고 1-2시간 안에 해 주는 한국식 안경점도 생겼지만 그래도 안경 한번 맞추는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안경점에서 대체로 1시간 이내에 다 할 수 있다는 걸 듣고 아이들이 한국에 가서 안경을 하겠단다. 그래서 고모가 애들을 데리고 스타필드 안에 있는 안경점에 데려가 각자 맘에 드는 안경테와 렌즈를 맞추었다. 이렇게 고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십중팔구 고모가 아이들 안경값을 내려 할 것이다. 사실 나도 조카가 온다면 그 정도를 할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일단 아이들이 나가기 전에 큰 아이에게 안경값을 네가 애플페이로 내라고 이야기 했다. 나중에 정산해 준다고. 하지만 이게 통할리 없다. 결국 "고모가 안경값 다 냈음" 하고 문자가 왔다. 

 

 

한국말이니까 가능한 말 장난. 참 재치 있는 문구라고 생각된다.

 

 

 

신세계 공원 묘역

 

아버지는 1남 4녀의 유일한 남자로 위로 누님 두분, 아래로 여동생 두분이 계신다. 아버지의 윗누님 두분, 나한테는 고모님 되시는 두분은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꽤나 된다. 큰 고모님의 맏이인 사촌 형은 아버지의 막내 여동생, 즉 나의 막내 고모님과 동갑이다. 큰 고모님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내가 미국 오기 한두해 전에 돌아 가신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작은 고모님은 꽤나 장수하셨다. 그래서 설/추석 때면 한번씩 고모님께 전화를 드리기도 했고 7년 전 한국에 왔을 때도 따로 찾아 뵈었더랬다. 그런데 비교적 건강하셨던 고모님이 작년 말에 돌아 가셨다. 거의 100순에 가까우셨다고 기억하는데 큰 병치례 없이 편하게 소천하셨다. 

 

큰 고모님께서 돌아 가셨을 때만 하더라도 덤덤하게 넘어가셨던 아버지께서 이번에 작은 고모님께서 돌아 가시자 조금은 마음가짐이 달라지신 것 같았다. 사실 상 이제 다음에는 당신의 차례라는 것 느끼기 시작하신 것이다. 올 초 집에 어머니와 안부 전화를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알고는 있으라며 요즈음 아버지와 함께 두 분이 쉬실 자리를 알아 보러 다니는 중이고 거의 결정하셨다고 말씀하신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당시만 하더라도 공원 묘지 산소에 묘를 쓰는 것이 당연했으니 산소를 만드셨고 한국에 있을 때 가족들이 다같이 성묘를 다녔더랬다. 그런데 이걸 내내 유지를 할 수가 없어서 작년 초쯤에 당신의 손으로 정리를 하시기로 마음을 먹으셨다. 그런데 묘를 없애고 그 안의 유골을 수습해서 화장하고 정리하는게 상당히 복잡한 절차를 요한다고 한다. 그냥 내 마음대로 묘를 파고 화장하는게 아니라 여러 관청에 신청과 허가를 받아야 하고 화장장도 따로 예약해야 한단다. 절차와 서류가 복잡해 동생이 아버지 모시고 거의 2주일 넘게 행정적인 일 처리하느라 여기 저기 다녔다고. 

 

이렇게 묘자리를 쓰면 차후 관리를 포함해 너무나 복잡한 일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나중에 우리들에게 부담을 안 주시겠다고 화장 후 유골 박스만 묻는 그런 자리를 알아 보셨단다. 화장을 한다면 납골당에 모실 수도 있지만 처가쪽 상을 치루어본 남동생이 말하기를 납골당도 일반 묘자리와 똑같다고 한다. 우리들에게 부담을 안 주시겠다고 생각해 주시는게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한번은 당신께서 돌아가시면 내가 미국에서 어짜피 금방 오기 힘들다고 나한테는 알릴 필요도 없고 나중에 장례 다 치르고 알려도 된다고 하셨단다. 그러자 어머님께서 누구 불효자로 만들 일 있냐고 버럭 하셨단다. 솔직히 장례는 죽은 사람을 위한게 아니다. 살아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권력자의 부모가 상을 당하면 장례식장은 미어 터지지만 그 권력자가 죽으면 문상객은 부모상의 반의 반도 안 된다. 

 

아내는 종합 검진 받으러 나갔고 아이들은 여동생네가 데리러 나갔으니 모처럼 시간이 생겼다. 마침 남동생도 그날 쉬는 날이라 둘이 아버지 어머니께서 정해 놓으신 그 자리를 보러 다녀 오기로 했다. 얼마 전 제대해서 아직 집에서 쉬고 있던 큰 조카도 합류했다. 남동생은 부모님을 모시고 몇번 다녀 왔기 때문에 남동생의 길 안내를 받아 집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을 찾아 나섰다.

 

정식 봉분을 만드는 형태는 아니고 아래쪽에 보이는 것처럼 화장 후 유골함만 땅에 묻고 그 위에 명판만 올려 두는 형태이다. 도자기 형태의 납골함을 묻는게 아니라 자연분해되는 유골함을 묻는거라 나중에 따로 파 내는 것이 아니라 땅속에서 자연적으로 다 분해되어 버린다고 한다.가톨릭 신자들만을 위한 구역을 이렇게 따로 만들어 놓았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고르신 장소는 일반 공원 묘역 안에 있는 구역이다. 입구부터 예전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던 일반 공원 묘역과 다르지 않았다. 산 두어개에 걸쳐 넓게 펼쳐져 있는 수많은 봉분들 사이로 좁다란 길을 따라 산길 하나를 넘어 갔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던 공원 묘역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모란공원"이었다. 지역명을 찾기 위해 검색을 해 보니 1966년에 조성된 대한민국 최초의 사설 공원 묘지라고 한다. "민주열사 묘역"이 따로 조성되어 있어 "전태일 열사", "문익환 목사", "김근태 전 국회의원", "박종철 열사"가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예전에 부모님과 성묘를 다닐 때는 이런 곳인지 몰랐다. 

 

그 "모란공원"에서도 그리고 이곳 "신세계 공원 묘역"에서도 공통적으로 느끼는 점은 왜 그렇게 길을 불편하게 닦아 놓았을까 하는 것이다. 차가 다녀야 하는 길들이 제대로 포장되어 있지 않아 덜컹덜컹 거리는 길을 다녀야 했다. 일부러 불편하게 해 놓은 것일까? 

 

부모님께서 고르신 장소는 정식 봉분을 올리는 자리가 아니라 그 근처 봉분이 제대로 놓일 수 없는 자리들을 모아 유골함만 묻을 수 있는 구역이었다. 게다가 그 구역은 가톨릭 신자들만을 위한 구역으로 만들어 제법 멋진 예수님의 석고상도 배치해 두었다. 우리가 흔히 납골당에서 보는 그런 도자기 형태의 납골함을 묻는 것이 아니라 자연분해 성분으로 된 유골함을 묻는 형식이라고 한다. 그래서 몇십년이 지난 후 다시 파 내서 처리할 필요없이 그대로 묻어 두면 자연적으로 땅 속에서 분해된다고 한다.

 

아직 정정하게 생활하시는 분들의 나중 자리를 본다는게 참 묘한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지만 당신들 누우실 자리를 스스로 고르고 앞으로도 어떻게 관리해 나갈지까지 고민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 드릴 수 밖에 없다. 그동안 어머니로부터 전화로 이야기만 듣다가 직접 와 보니 너무 외지지도 않고 햇살도 잘 드는데다가 전망이 잘 트여 있어 마음이 조금 놓였다. 게다가 언덕 위 두 팔을 벌리고 서 계신 예수님 석고상을 보니 묘하게 어떤 안정감도 들고 안식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두 분께 감사하고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안심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왠지 이 곳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두 분을 뵙기 위해서는 지금 일산 집이 아닌 이 곳으로 따로 찾아 와야 하는 곳이라는 생각에 무거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현실이겠지만 그날이 될 수 있으면 빨리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송추 가마골 본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니 얼추 점심 시간이 되었다. 길을 함께 따라나선 조카 녀석에게 무얼 먹고 싶냐고 했더니 송추 가마골에 가고 싶단다. 남동생이 이곳 여러 지점 매니져를 했기 때문에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녀석이 점심부터 근사한 소고기를 먹고 싶은가 보다라고 생각만 했다. 차에 앉아 네비게이션을 켜고 남동생이 일러 주는 위치를 집어 넣으니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송추 가마골 본점이 있었다. 

 

굽이길을 다시 돌아 나와 식당으로 가니 근사한 건물이 하나 나왔다. 4-5층 정도 되어 보이는 건물 전체가 식당이었다. 유명한 곳이고 본점이니 꽤나 근사한 곳이긴 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과 조카와 함께 식당 입구로 들어 가는데 조카가 입구에 계신 분에게 꾸벅 인사를 하면서 반갑게 안부를 여쭙는 것이다. 남동생도 그 분과 가벼운 인사와 잡담을 나누었다. 식당으로 올라 가니 지나가는 서버분들이 다들 조카를 보면서 너무 너무 반가와 하시는 거다. 도대체 얼마나 자주 왔길래라는 생각이 들 즈음 남동생이 설명해 준다. 군대가기 전까지 여기서 1년 넘게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것이다. 일주일에 2-3일씩, 방학 중에는 거의 주 5일 여기서 일을 했단다. 그제서야 왜 입구에 계신 분들과 서버분들이 반갑게 조카를 맞이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여기저기 지점이 꽤나 될만큼 유명한 식당이니 만큼 고기는 꽤나 질도 좋았고 맛있었다. 여자 애들만 데리고 다니느라 아이들이 고기집을 가더라도 그리 많이 시키는 편이 아닌데 남자 애들은 체급이 달랐다. 이걸 다 먹을 수 있어라는 생각이 들만큼 푸짐하게 시키고 거기에 냉면에 공기밥까지 시켜 먹는데 나중에 부족한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먹었다. 나도 고기라면 꽤나 잘 먹고 많이 먹는 편이지만 남자 조카 한명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남자 애들 두셋이면 식비가 장난이 아니라고 하더니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일산 집에서 꽤나 떨어져 있고 버스도 한번인가를 갈아타야 해서 편도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라고 생각되는데 그 오랜 기간을 꽤나 열심히 다녔나 보다. 잘한만큼 같이 일하는 분들께도 인정 받고 다시 찾았을 때도 환영 받는 걸 보면 조카 녀석이 꽤나 성실하게 지냈나보다. 그 거리에 고기집 아르바이트면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말이다. 맛이 꽤나 좋았기 때문에 남동생에게 시내 어디쯤 지점이 있는지 알아 보고 돌아가기 전에 가족들과 함께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식사

 

일산으로 돌아와 집에 들어가기 전에 아파트 단지 앞 카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면서 마지막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동생은 치과 치료 받으러, 조카는 인천에 친구들 만나러 가야 한다고 해서 거기서 헤어지기로 했다. 아침부터 계속 운전하고 다녀서 그런지 나도 집에 들어와 잠깐 낮잠에 빠졌다.

 

아이들은 고모/고모부랑 계속 시간을 보내고 6시쯤 고모와 함께 돌아 왔다. 퇴근 시간이 되어 다시 돌아 가려면 꽤나 걸릴 것 같아 그냥 여기서 같이 저녁 먹고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여동생이 주변 지리를 잘 아니 너무 멀리 가지 않고 단지 주변에 걸어 나가 먹을만한 것이 있을지 찾아 보았다. 그렇게 고모와 아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찾아낸 오늘의 저녁 메뉴는 족발. 미국에서도 족발을 먹을 수 있냐고 묻는 분들도 있겠지만 한국 마켓에 가면 진공포장된 족발부터 San Jose/CA에서는 직접 족발을 쪄서 파는 한국 가게도 있었다. 요즈음은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먹을 수 있다. 다만 너무 비쌀 따름이지.

 

가족들이 전부 가게까지 걸어 갔는데 평일 저녁임에도 가게에 자리가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집에서 편하게 먹기로 하고 포장 주문을 해서 돌아 왔다. 미국에서 거의 대부분 한국 음식들을 먹을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직접 먹는 것만하지는 않다. 훨씬 부드럽고 가격에 비해서 양도 푸짐했다. 부모님과 나, 여동생을 포함한 성인 네명, 그리고 아이들 세명이 푸짐하게 먹고도 남을 정도였다. 아마 조카 둘 중에 한명만 있었더라면 부족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 보긴 하지만서도.

 

정말 한상 가득한 족발 포장. 대짜를 주문한 걸로 기억하는데 결국 다 못 먹었다. 그래도 쫀득한 식감과 훨씬 부드럽고 갖만들어낸 느낌이 좋았다. 환율 때문인지 느껴지는 가격도 훨씬 쌌으니 금상첨화. 한국에서 지내면 이런 것이 제일 아쉬운 부분이다.

 

 

하루 종일 같이 다니면서 고모/고모부로부터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들었던데다가 마침 그날 여동생네가 응원하는 삼성의 경기가 있어서 저녁 먹는 내내 야구 경기를 틀어 놓았더랬다. 아이들이 야구의 룰을 정확히 몰랐었는데 게임이 진행되면서 여동생에게 물어 보고 설명을 들으며 조금씩 내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느 게임이든지 룰을 이해하면 재미있어진다. 그 이후로도 한국에 있는 동안 아이들이 야구 중계를 몇번 챙겨 보는 것을 보았다.

 

 

오늘 밤을 보내고 나면 내일은 이제 처가집으로 내려 간다. 부모님들과 아이들이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부족한게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3년쯤 지나고 나면 막내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니 좀 더 여유 있게 다녀 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