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런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자기 소개서나 인적 사항을 적는 폼을 보면 늘 "취미"에 대한 항목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미국에서는 한번도 그런 폼/항목을 보지 못했지만 한국에서는 동네 마트부터 백화점 회원 가입에도 "취미" 항목이 있었다. 왜 필요한걸까.
이 항목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내용은 "독서", "영화 감상", "등산" 아니면 종종 "뜨게질",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안 하는 것 같은 "우표 수집"이었던 것 같다. 내 경우에는 반반 정도 "독서" 혹은 "영화 감상"이었다. 그래도 이 중에 더 끌리는 건 영화다.
언제부터 영화를 좋아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가장 오래된 추억은 중학생 때 강남역에 있는 동아 극장에서 케빈 베이컨 주연 "Footloose"를 상영했는데 당시 어머니에게 이 영화 보고 싶다고 가서 봐도 되냐고 허락 받았던 기억이다. 그런데 막상 보지는 못했다. 혼자 지하철 타고 동아 극장까지 갔는데 모두 매진이었다. 이 동아 극장은 추석에 성룡 영화를 개봉하는 걸로 유명했는데 지난 번 한국 방문 때 강남역 근처를 지나다가 아직 그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너무 반가웠다. 물론 그 때의 단관이 아니라 멀티 플렉스로 변해 옛 모습은 하나도 없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그 오래 전 그 곳에 영화 보러 다녔던 기억을 떠 올릴 수 있었다.
다른 추억은 고등학생 때라고 기억하는데 집에 최인호 작가님의 "겨울 나그네"라는 소설책이 있었다. 겨울 방학 때인가 그 책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안성기, 강석우, 이미숙 주연의 영화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게 마침 동네 동시 상영 재개봉관에서 상영 중이었다는 걸 알았다.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였지만 동네 동시 상영관에서 하는 거라 신분증 검사 같은 건 아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 때도 당당하게 어머니에게 소설책 읽어 봤고 영화가 너무 궁금하니 가서 봐도 되겠냐고 허락을 받고 당당히 돈 내고 들어가 보았더랬다. 조숙했다라기보다 그 때부터 영화에 참 관심이 많았더랬다.
그렇게 영화를 참 좋아했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기사나 관련 이야기들도 많이 찾아 보았고 어느새부턴가 좋아 하는 영화에 대해서는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는 VHS 비디오 테입을 빌려와 보고 반납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종종 폐업하는 비디오 가게가 있어 비디오 테입을 팔기도 했다. 그런 곳을 수소문해서 하나씩 수집하기도 했고 구하기 어려운 것들은 무려 해외 주문을 통해서 국제 우편으로 받아 보기도 했다. 96년 즈음 그렇게 미국 홈비디오 파는 사이트에서 처음 구매했던 것이 Wallace & Gromit 3 episode를 boxset으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학과 사무실에서 국제 우편으로 배달된 이 VHS boxset을 집어 들고 막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지도 교수님께서 "쯧쯧" 혀를 차시며 지나가시던 생각이 난다.
하지만 어느새 DVD가 VHS를 대신하게 되고 DVD는 VHS 보다는 좀 더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용산 전자 상가에 가면 시중보다는 좀 더 저렴하게 세일하는 것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DVD 시대가 되면서 예전보다는 좀 더 많은 영화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2008년쯤이 되자 점차 1080P full HD TV들이 보급되기 시작하고 미디어도 DVD에서 Blu-ray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Sony의 PlayStation 3로 Blu-ray player 삼아 46인치 첫 full HD 삼성 TV를 구매하면서 비로소 환상적인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다. 아, 그동안 VHS와 DVD 화질은 얼마나 구렸던 것인가....
어느 취미나 다 그렇듯이 점점 빠지기 시작하면 장비에 매달리기 시작한다. 내 경우에는 간단했다. 더 좋은 TV. 어쩌면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귀는 약간 막귀라 심오한 오디오의 세계로 빠져들지는 않았다. 나에겐 화질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화질 다음엔 더 큰 화면. 그렇게 무리를 해 가며 와이프의 용서와 함께 드디어 65인치 LED TV로 옮겨 간다. 그리고 Pixar의 Ratatouille를 Blu-ray 타이틀로 보면서 주인공 생쥐 Remy의 털이 그렇게 생생한지 처음 알게 되었다. 같이 보던 와이프는 생쥐의 털이 너무 생생해서 징그럽다고 중간에 나가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화질의 끝판왕 4K Blu-ray. 이를 위해 다음에 구매한건 LG OLED 4K TV. 혹시라도 4K Blu-ray player를 가지고 있고 Dolby HDR을 지원하는 LG OLED TV를 가진 분에 계신다면 "Planet Earth II"를 4K Blu-ray로 한번 보시기 바란다. 지금까지 보아온 여러 4K 화질 중에서 단연 최고임을 단언한다.
이야기가 좀 옆으로 샜는데 이렇게 영화를 좋아하게 되니 본 영화 중에 인상 깊은 것들,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하나씩 사 모으는 것이 어느새 소확행이 되어 버렸다. 비싼 명품이나 물건들도 아니고 하나에 대체로 Blu-ray는 $10 미만, 4K Blu-ray는 $20 미만으로 가격으로 한달에 한개 정도에서 많으면 서너개 정도 구매하는 건 그다지 비싸지 않으면서도 행복해 질 수 있는 그런 취미일 수 있다. 게다가 맘에 드는 영화가 있으면 찜해 두었다가 가격이 내리길 기다려 $25 정도 하던 것이 어느날 $15 정도로 떨어져 살 수 있으면 그 동안 기다리면서 자꾸만 확인하는 과정들도 묘하게 은근히 즐길 수 있는 기다림이기도 하다. 처음엔 DVD로, 그러다가 Blu-ray로, 그 중에 정말 맘에 들거나 화질로 승부하는 최근 영화들은 다시 4K Blu-ray로 새로 사기도 했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모은게 책장 세개를 채우게 된다.
여기 있는 타이틀을 다 플레이해서 본 건 아니다. 예전에 이미 극장이나 TV의 명화의 극장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본 것도 있어 타이틀을 사 놓고 아직 비닐 커버도 안 뜯은 것도 반 이상이 되지 싶다. 그걸 보고 언젠가 친구가 물어 본 적이 있다. 보지도 않은 거면서 왜 사 모으냐고. 우표 수집이나 예쁜 그릇을 모으는 것 등등도 사실 쓰려고 모으는 건 아니다. 그냥 가지고 싶어서 내 손에 직접 들고 볼 수 있는 물리 매체로써 보관하고 싶어서 사고 모으는 중이다. 그냥 작은 취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판데믹 시대를 지나면서 넷플릭스나 디즈니 플러스 같은 OTT 서비스가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내가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그냥 TV만 들면 바로 볼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건 내 손에 있는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다"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특히나 넷플릭스에서는 자기네가 제작한 것이 아닌 다른 영화들의 경우 볼 수는 있지만 소유하지는 못한다. 계약이 만료되어 넷플릭스에서 사라지고 나면 다시 볼 기회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꾸역꾸역 물리 매체로써 타이틀을 사 모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건 내 소유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OTT 서비스가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Blu-ray/4K Blu-ray 타이틀을 직접 사는 사람들이 줄어 들게 되고 그러다보니 Target, Best Buy등 로컬 리테일 상점들이 더 이상 타이틀을 팔지 않게 된 것이다. 예전엔 한번씩 Target이나 Best Buy에 방문해 내가 찾던 영화가 세일 중인지 아닌지, 혹은 구하기 힘든 타이틀이 있는지 찾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Amazon이 아니면 Blu-ray/4K Blu-ray 타이틀을 구매하기가 쉽지 않아졌다. 또 종종 할인도 많이 했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도 많이 없어져 예전만큼 가격도 쉽게 내가 원하는 가격대로 내려가지 않게 되었다. 불과 2-3년 전만 하더라도 출시된지 6개월 정도만 기다려도 4K Blu-ray 같은 경우 $15 아래로도 살 수 있었지만 요즈음에는 왠만해서는 $20 아래로는 잘 내려 오지 않는다. 아, 왠지 좋은 시절이 지나가는 기분이다. 나의 작은 취미가 점점 어려운 취미가 되어 가고 있다.
예전에는 금요일, 토요일 저녁만 되면 저렇게 모아둔 타이틀 중에 하나씩을 골라 movie night를 즐기곤 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여전히 일 때문에 바쁘거나 다른 집안 일 때문에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조금 마음의 부담을 내려 놓고 예전처럼 movie night을 다시 즐길 수 있는 때가 어서 오기를 바래 본다.
이렇게 영화를 좋아하고 취미로 모으고 있다고 하면 다들 한번씩 물어 보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이 중에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뭐냐고... 그런데 딱 하나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대체로 Star Wars 시리즈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 이외에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다크 나이트 3부작도 있다. 어쩌면 딱 하나를 꼽는게 가장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가지고 있는 타이틀들 중에서 시간 날때 마다 하나씩 보게 되면 그 영화가 어땠는지 한번 이야기 해 보려 한다. 영화 리뷰도 아니고 전문적인 해석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다.
그냥 한 사람이 보는 영화 감사평.
아무리 몇번을 봐도 TENET은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