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마을 - 옛 수필

어떤 기억 속으로...

피터K 2021. 6. 18. 12:40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지난 일요일 새벽.

꼭 축구를 보아야 겠다는 열망보다는 다가온 프로젝트의 최종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어쩔 수 없이 새벽녁까지 실험실에 있게 되었다.

조금은 피곤한 마음에 실험실에서 후배들과 같이 축구는 보는 것보다

얼른 씻고 나서 침대에 누워 편안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방으로 내려와 후다닥 씻고나서 침대에 있는 쿠션들을 모아 

거기에 기대어 축구 경기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왠지 이러고 있으면 노곤한 기분과 함께 참 편해지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경기 결과는 이미 알려진 대로 참담한 것이었다.

후반전 중반쯤 지나자 이미 경기에 흥미를 잃어 버렸고

야식조차 챙겨 먹지 않아서 그랬던지 무척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경기가 흥미진진했더라면 그런 배고픔은 조금 잊어 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시간은 새벽을 넘어 아침으로 치닫고 있었고

창밖은 새로운 아침의 채색을 나타내고 있었다.

혹시나 숨겨둔 어떤 빵 조각이나마 남아 있지 않을까 냉장고부터

시작하여 모든 곳을 뒤져 보았지만 역시나 아무 것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주린 배를 참으며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는 순간 문뜩 책상 위에

노란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 왔다.


음, 정확히 언제쯤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새 건물로 

이사를 온 후에 아직 예전 건물에 남아 있던 우편함으로 찾으러 

갔던 기억이 나는 걸로 봐서 3월 중순쯤이었나 보다.

조금은 뜻하지 않은 선물에 약간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내겐 늘 고지서와 외국 저널만이 쌓여 있었는데 낯설지 않은 누군가의

글씨가 적힌 소포가 참 반가웠다. 아마도 기대를 하지 않았던 일이었기에

더욱 그랬나 보다. 처음에 소포 용지로 포장된 것을 뜯어 보지 않고

흔들어 보았다. 무척 가볍게 느껴졌기 때문에 과연 무엇이 들었을까

미리 한번 추측해 보려 했던 것이었다. 후후.. 하지만 뭔가 톡톡 거리는

소리 이외에는 들려 오지 않아서 금방 추리의 즐거움은 접어 두고

뜯어 보았다. 노란 상자. 그리고 그 안엔 여러 가지 사탕과 초콜렛이

들어 있었다. 묘한 날짜즈음에 받아서 선물이 가지게 되는 어떤 특별한 

의미보다는 그저 가끔씩 생각해 주고 날 행복하게 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마웠다. 

하지만 그 사탕과 초콜렛들을 눈에 띄일 때마다 먹었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오히려 선물 그 자체가 너무도 나의 입가를 촉촉히 해 주었기 때문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었다. 그러다 그 날, 희미한 아침 햇살 속에서

그 노란색에 다시 눈길이 머문 것이었다.


상자를 열어 보니 아직 사탕과 초콜렛들이 남아 있었다. 너무나 배가

고팠기 때문에 그 중에서 초콜렛만을 골라 집어 내었다. 

이미 축구에 대해서 흥미는 잊어 버렸고 멍하니 시선만 티비를 향한 채

서서히 몰려 드는 피곤함과 졸음에 몸을 맡기며 입 안에서 달콤이 

녹아 드는 초콜렛 향을 느꼈다. 

축구는 끝나 버렸고 나도 이제 잠을 청할 시간이 되었다. 입 속에는 

아직 달콤함이 남아 있었고 어느 영화의 재목처럼 씁쓸한 맛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막 그 노란 상자의 뚜껑을 닫는 순간

창가로 스며 들어온 햇살이 그동안 나의 시선에서 감추어져 있었던 

몇 글자들을 비추었다.


어느 누군가가 상상해 보는 그런 화려한 문구나 숨겨둔 어떤

고백은 아니었음을 먼저 이야기 하고자 한다. 

다만 노란 상자의 뚜껑에 미처 알아 보지 못했던 어떤 글을

발견했다는 것 이외에는 말이다. 잠시의 순간동안 피곤했던

마음의 허기짐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큰 점수차로 져 버린

축구 결과 때문에 약간은 날카로왔던 기분도 다시 예전에 나의

편안함 속으로 되돌아 갔다. 


'추억은 있는 그대로의 추억으로 남고 싶습니다.'

정확한 문구는 아니지만 예전에 받아 들고 기뻐했던 그 소포의

낯익은 글씨가 다시 한번 눈에 들어 왔다. 그것을 보는 순간

처음 소포를 뜯었던 때의 기억이 새삼 다시 떠 올랐다.

혹시나 어떤 편지나 쪽지가 들어 있지나 않을까 하는 바램으로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모두 꺼내고 장식으로 담겨져 있었던

실날과 같은 보푸라기도 모두 집어 내어 봤던 그 때의 기억이 말이다.

그러나 아무런 메모도 없었고 난 그저 나의 또 하나의 어떤 바램에

피식 웃었던 그 하나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의 말이 맞는 모양인가 보다. 추억은 있는 그대로의 추억인 것처럼

문뜩 발견하게 된 숨겨진 하나의 주문으로부터 처음 소포 선물을 받았을 때의

기억들이 하나씩 둘씩 머리 속에 떠올라 맴돌 수 있었던 이유는 말이다.

어쩌면 뜻하지 않게 화이트 데이에 맞추어져 생각이 고정되어 있던

순간을 지나 나에게 정말 알려 주고 싶었던 이 노란 상자의 어떤 의미는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추억은 그 추억으로 남는다는...


문뜩 지나간 시간동안 적어 놓았던 수많은 추억의 이야기들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 본다. 때론 행복하고 즐거웠던 그리고 때론 너무나 슬프고

힘들었던 그 모든 것들이 하나 둘 어둠 속에서 떠올라 내게 한마디씩의

인사를 건네 보는 것만 같다. 

어느새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어느 누군가의 추억 속에서

그렇게 빛바랜 모습으로 늘 숨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 모습은 늘 웃는 모습으로 행복했던 모습이었으면...


나도 모르게 그 마법의 주문을 외워 본다.

그래, 모든 추억은 그 추억대로 남아 있을려고 하는거야....

그리고 그 주문들을 사람들의 귓가에 소근거려 본다.

당신의 기억들이 하나씩 생각나요... 추억이란 선물로 말이에요...

그렇게 날 기억해 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