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날만큼 서로 사랑한 것처럼...
*!* 이 글은 1994년에서 97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 이야기 하나 -
예전에 본 영화 중 '레이디 호크'란 영화가 있었다.
남자 주인공은 룻거 하우어(블레이드 런너에서 남자 인조 인간역)였고
여자 주인공은 미셀 파이버(제대로 읽는 건가??)이였다.
아마 영화를 본 사람은 내용을 기억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럼, 잠시 영화에 대한 이야기.
영화의 시대는 중세쯤이다. 첫 장면부터 룻거 하우어는 중세 기사의
모습으로 나온다. 긴 장검과 검은 말을 타고 마치 떠돌이처럼
황혼을 거닌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의 어께에는 매 한마리가
늘 자리를 차지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누군가를 찾아 나선 것처럼 보인다.
밤이 되면 이상하게 그는 자취를 감춘다. 대신 그 자리엔 미셀 파이버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곁엔 검은 표범 한마리가 그녀를 보호한다.
룻거 하우어를 따라 다니는 시종은 이런 모습을 늘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그 해답을 주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이 비밀이 풀어지는데 그건 바로 어떤 마법사가 내린 두 사람에 대한
저주였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미셀 파이버에게
마법사가 청혼을 한다. 하지만 미셀은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서
그 청혼을 거절하게 되고 화가 난 마법사는 두 사람에게 저주를
내리는 것이다. 평생 서로 만날 수 없는 저주를 말이다.
낮이 되면 미셀은 인간에서 매로 변한다. 해가 떠 있는 동안
그녀는 그저 한마리의 짐승일 뿐이다. 반대로 해가 져서 밤이 되면
룻거가 표범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둘은 서로 만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매와 표범의 모습일 때는 그저 동물의 감각만 가지고
있으며 본능적으로 서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기억나는 장면 하나... 어느 날인가 룻거가 누군가와 싸움을 하고
난 후 막 황혼이 질 무렵이었다. 해가 지평선에 걸쳐 있는 동안
남자는 다시 표범의 모습으로 여자는 사람의 모습으로 막 바뀌려는
순간이었다. 이때 잠시 두 사람은 서로 그리워하던 모습을 보게 된다.
상처를 입어서 움직일 수 없는 남자와 아직 완전히 변하지 못한 여자는
서로의 손을 뻗어 잡으려 하지만 막 서로의 손끝이 닿으려는 순간
남자는 완전히 표범으로 변해 버린다.
...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가장 혹독한 저주가 아닐까...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날 수 없다는 것은...
- 이야기 두울 -
후후, 아마 이 이야기를 꺼낸다면 내 문화 수준이 드러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
한 만화 잡지에 나온 이야기이다. '미스터 부'란 아주 황당한 만화인데
엄청난 페러디와 전혀 예상치 못한 스토리의 전개로 늘 배꼽을 잡는
이야기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의 눈길을 잡아 채던
한 캐랙터가 있었다. 그건 바로 '피그로우'. 이 마저도 실은
영화 '크로우'를 빗대서 까마귀가 아닌 도야지가 수호 천사인
그런 캐랙터를 페러디 한 것이다. 그저 만화의 내용대로 웃음만을
주는 캐랙터였다면 난 그 피그로우를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가진 슬픔이 내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마치 영화 '크로우'에서
주인공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악당들을 혼내는 것과 비슷하게
피그로우는 부활한 캐랙터이긴 하지만 저주를 받아 결코 죽지 않는
캐랙터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영화처럼 악당들과 싸우며 그들을
혼내 주지만 그는 늘 슬픔에 쌓여 있다. 왜냐 하면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
그에게는 사랑하는 이가 있었다. 마치 영화의 내용처럼 그녀는
악당들에 의해서 살해를 당하였고 그 때문에 그녀는 영혼의 세상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피그로우는 죽을 수가 없다. 그에게 내려진 저주 때문에
말이다. 자신도 죽어야만 영혼의 세상으로 가서 그녀를 만날 수 있지만
아무리 힘든 싸움이나 어려움 속에서 상처를 받더라도 결코 죽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가끔씩 대사 속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죽을 수만 있다면... 단 한번만이라도 죽을 수만
있다면...
그 다음 말은 그녀를 만날 수 있을텐데... 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 그는 얼마나 괴로울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 이야기 세엣 -
이 이야기는 우리 나라의 전설이다. 바로 견우와 직녀.
천상에서 하지 말아야 할 사랑을 함으로써 결국 벌을 받아 하늘의
끝과 끝으로 각각 헤어져 은하수에 가로 막혀 있는 이야기.
그나마 일년에 한번 까마귀들의 도움을 받아 오작교를 통해 만난다는게
행운이면 행운일까?
어째꺼나 앞의 두 이야기에 비하면 견우와 직녀는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일년에 한번 밖에 못 만난다면
364일의 하루 하루는 그렇게 길게 느껴지겠지만 칠월칠석 날 하루는
너무나 짧게 느껴지지나 않을까?
- 이야기 네엣 -
주위에 보면 사귀는 사람을 먼 곳에 둔 사람들이 참 많아 보인다.
학교가 포항이라는 곳에 위치해 있고 또한 대부분 타향이 고향인
사람들이 많아서 그럴까? 포스비에 있는 수많은 보드들 중에서
'group/LoverInSeoul'란 보드를 보고 잠시 웃음을 지었다는게
그저 지나 가는 일상의 한 유희였다면 다행일까.
후후, 그래서 그런지 밤만 되면 마치 반딧불족처럼 기숙사 휴게실과
베란다, 그리고 건물 여기 저기에서 전화기와 핸드폰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서로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는 마음이
하도 간절하기 때문일까? 후후.. 아마 전파가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영상 혹은 어떤 마음마저 전해 준다면 이 작은 뽀스떼끄 마을이
환해질지도 모르겠는데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에 남겨 두고 있는 사람들은 어쩌면 앞선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보다 행복한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보고 싶을 때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함께 할 시간이 다가
오고 있으니 말이다.
늘 전화 끊기가 아쉬워 오는 졸음을 참으면서도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이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마법의 저주를 받기 보다는
누군가의 축복을 받았으면 좋겠다. 힘들 때 어딘가에 기댈 어깨가
있고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을 받은 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의 외모의 모습이 아니라 그 마음만이라도
담아 둘 수 있다면 그 두 사람은 참 행복할 것 같다.
서로에게 지금 어떤 모습이 기억나냐고 물었을 때
오똑한 코나 통통한 뺨의 모습이 아닌
늘 눈에 서려 있는 맑음이나 상대방의 어께 한켠에 코를 숨기고
안겨 있을 때 느끼던 편안함이 떠오른다면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건 아닐지...
잠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사람에게 늘 그런 행복이 함께 하기를
빌어 본다. 그리고 지나온 날만큼 서로 사랑한 것처럼 앞으로도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