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마을 - 옛 수필

귀를 기울이며...

피터K 2021. 6. 18. 12:27

*!* 이 글은 1994년에서 97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머신이나 혹은 피씨 앞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스쳐 지나가며 볼 때면 가끔씩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답니다.

화면에 커다랗게 윈도우를 띄워 놓고 프로그래밍을 하는 사람도

있고, 넷스케이프를 띄워 잠시의 여유를 찾아 신문을 보는 사람도

있고, 워드를 띄워 열심히 문서 작업을 하는 사람도 볼 수 있죠.

저마다 각기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차분히 하는 것을 보며

난 오늘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도 곰곰히 생각해 본답니다.


문뜩 그렇게 지나던 어느 누군가의 화면에서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메일을 보게 되었답니다. 후후.. 일부러 엿보려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얀 화면에 가득 채워진 메모가 궁금해서 어깨 너머로

잠시 시선을 옮겨 보았던 것이지요. 내가 그 화면을 함께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을 안 이 친구는 나를 되돌아 보고는 피식 웃었지요.

그리고는 얼른 메일을 보내 버렸답니다. 

그러나 그 메일의 마지막에 나의 눈길을 끄는 한가지 문장이 있었기에

그 친구에게 물어 보았지요.

저건 무슨 뜻이야?

거긴 이렇게 적혀 있었답니다.

"어제 말이 끊겼을 때 난 무어라고 말했을까?"  :)

그리고 그 친구는 나의 채근에 못 이겨 이 문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답니다.


요즈음 자기와 매일 통화를 한 친구가 생겼답니다. 아직 무슨 특별한

사이는 아니지만 서로 하루의 일기를 상대방에 귓가에 적어 보는

그런 친구가 말입니다. 이 친구는 핸드폰이 있기 때문에 그 전화하는

친구와는 늘 핸드폰을 사용해서 전화를 한답니다.

실험실에 있으면 다른 사람들의 눈치도 보아야 하고 또 교수님이 

찾으시는 급한 전화가 올지도 모르기에 실험실 전화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아마 며칠 전의 일이라고 합니다.

약간은 어두운 실험실 복도에서 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그만 갑자기 통화가 끊어졌더랍니다. 후후,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고

이 친구는 상대방이 말하는 것이 들리지만 상대방은 이 친구가

말하는 것이 안 들리더랍니다. 아마도 그건 두 사람 모두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어서 그랬나 봅니다. 친구는 계속 '여보세요' 그랬지만

상대방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 쪽도 '여보세요'란 말만

하더랍니다. 잠시 그러는 동안 상대방은 통화가 끊어졌는가 보다

생각을 하고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어, 끊어졌나봐. 들리니? 음... 장난 하는 건가?

음... 누구 바보~~.... 누구는 바보~~~  여보세요"

그리고는 툭하고 전화가 끊어졌답니다. 

후후.. 친구는 너무 우스워서 한동안 하하하 웃었답니다.

내가 안 들리는 줄 알고 저렇게 말을 하다니 말이에요. :)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받자 마자 이 친구는

마악 웃었더랍니다. 상대방은 이 친구가 왜 웃는지 몰랐지요.

"너, 내가 못 듣는거 같다고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니?"

"어.. 어.. 내가 뭘, 내가 뭘.. ^^;"

하하하.. 상대방은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하고 극구 부인(?)을

하더랍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미 이 친구는 다 들었는데 말이에요. 후후... :)


그리고 한동안 이야기가 더 흐른 후에 아까의 그 이야기로 다시 화제가

되돌아 갔답니다. 

"넌 내가 하는 말이 다 들렸어?"

"응. 난 내가 바보인지 몰랐어" --*

"하하하..."

"난 네가 말하는 걸 다 들었는데 넌 내가 하는 말을 하나도 못 들었구나?"

"어, 넌 뭐라고 그랬는데..."

"후후.. 음.. 글쎄... 뭐라고 그랬을까?" :)

"뭐라고 그랬어? 말 해 줘... 뭐라고 그랬는데?"  ^^;

"하하.. 아냐.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에이, 거짓말. 너 뭐라고 그랬어?"

"하하.. 난 아무 말도 안 했다니까..."  :)


그렇게 전화 통화가 끝나고 나서 나중에 다시 안부를 전하느라

그 친구에게 메일을 쓰고 있었던거 랍니다. 후후..

그리고 그 맨 마지막에 그런 말을 붙인 것이었지요.

"어제 말이 끊겼을 때 난 무어라고 말했을까?"  :)


후후.. 나도 참 많이 궁금했습니다.

넌 뭐라고 그랬었는데?   나? 후후. 아무 말도 안 했어. 정말...

그럼 왜 메일에 저렇게 적었어? 꼭 마치 어떤 이야기를 한 것처럼

썼잖아...   아, 그건 말이야....

그건 말이죠, 그냥 상대방이 어떤 말을 했는지 상상해 보라고

적은 말이었답니다. 후후...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어쩌면

그 쪽 친구도 듣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것이 어떤 말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어떤 여지를

남겨 둠으로써 상대방이 듣고 싶었던 그 말을 자신이 넣어 보기를

바래서 그랬다고 하는군요. 후후...

그건 아무도 모를꺼에요. 그 메모를 읽은 친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말이에요. 좋아 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면 좋아 한다는 말을

떠올릴 것이고 이제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면 그 말을 넣었겠지요.

아니면 그저 단순히 보고 싶다는 말을 넣어 볼지도... 


무언가를 직접 이야기 하지 않고 어떤 상상으로 남겨 둔다는 것은

아마도 행복한 고민을 남겨 두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침묵 속에 숨겨져 있던 그 말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해도

그 사람은 이 고민을 떠올릴 때마다 이 친구를 함께 떠올릴테니

말입니다.



햇살은 이제 너무나 눈이 부셔 잠시라도 파란 하늘을 쳐다 볼 수가

없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가끔씩 어깨에 쏟아지는 그 더위가

너무나 무거워 잠시 쉴 곳을 찾는다면, 그리고 그 여유 속에서

한잔의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다면 그 편안함 안에서 

난 어떤 고민을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누군가 내게 그러더군요. 그 땀을 식혀 주는 바람이 너의 귓가를

스쳐 지나 갈 때면 잠시 그 바람에 귀를 귀울여 보라고요.

그럼 거기엔 내가 적어 놓은 나의 일기를 그 바람이 일러 줄꺼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잠시 귀를 귀울여 봅니다. 뜻하지 않은 매미의 울음 소리와

너무나 빨리 찾아온 잠자리들의 날개짓 사이로 내가 기억하는

이들의 짧은 귓속말들이 숨어 있는 것만 같습니다.


한 여름 밤은 나도 모르게 스쳐 지나가 버리나 봅니다.

내 마음 속의 작은 이야기들을 한껏 담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그 푸른색 한줄기 바람과 함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