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마을 - 옛 수필

저 작은 문을 두드리며...

피터K 2021. 6. 18. 12:24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내가 처음 우리 실험실에 들어 왔을 때 참 신기했던거 하나가

실험실 입구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커다란 냉장고였다. 그 냉장고 속에는

온갖 음료수가 들어 있었고, 사람들은 먼 학생 회관의 매점까지 가지

않고, 또 그 매점이 문 닫은 시간이 지나도 음료수를 꺼내 먹을 수 있었다.

난 이게 왠 떡! 그랬는데 냉장고 담당 선배는 당장 내 지갑에서 만원짜리

하나를 빼앗아 갔다. 

"만원어치만 너 먹고 싶은 만큼만 맘대로 꺼내 먹어."

난 실험실에서 배풀어 주는 교수님의 넉넉한 아량이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부질없는 김치국이란건 금방 깨닫게 된 것이다. --*


냉장고 내의 메뉴는 한 학기씩 돌아가면서 맡는 냉장고 담당자의 입맛(?)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듯 싶다. 우선 돈줄이 자신에게 있으므로 

매점에 가서 사고 싶은 음료수를 고를 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고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동안 참 많은 음료수들이 우리 실험실의 냉장고를

거쳐 갔고, 이제는 과거의 향수가 된(?) 추억 속의 음료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메뉴 중에서 꼭 빠지지 않는 음료수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콜라이다. 이건 교수님이 가장 좋아 하시는 메뉴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아마도 빠지지 않는 메뉴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묘하게도

프로그래밍을 하다 보면 손이 자꾸만 콜라 쪽으로 가게 된다. 

교수님이 미국에 계실 때 같은 실험실의 한 사람은 그 콜라를 마실 때마다

빈 깡통을 옆 책상에 쌓기 시작했고 졸업 할 때가 되어선 천장 가득히

콜라 캔을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콜라탑에다가 본드를 발라서 

무너지지 않는 성을 이루었다는 전설을 들려 주셨다. 이렇게 콜라를 좋아

했던 그 사람은 결국 자신의 논문 Acknowledgement(감사의 글)에다가

코카 콜라 company에 감사 드린다는 말조차 넣었다고 한다. :)

이 이야기를 들은 올 신입생 하나는 벌써부터 이 콜라캔을 쌓기 시작하고

있다. --*


냉장고 안에 꼭 음료수만 채워지는 건 아니다. 밤샘을 많이 하는 까닭에

가끔은 음료수 뿐만이 아니고 여러 가지 과자라든가 컵 라면이 채워

지기도 한다. 한 때는 늘 야식으로 이 컵 라면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후후..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입맛도 변해 가는지 요즈음 냉장고의

한켠을 차지 하고 있는건 우리 나라 국민 만인의 간식인 바로

오리온 초코파이이다. ^^;


초코파이를 사 먹기 시작하면서 참 묘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건의

발단은 바로 이 초코파이 안에 들어 있는 '꼬빌 마을 세트'이다. 

처음엔 후배들이 하나 둘씩 모으기 시작하더니 이젠 각자의 머신의 앞에

이 꼬빌 마을 세트가 줄줄이 늘어서 있고, 하나라도 더 새로운 것을

차지 하기 위한 눈치 작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은 사람들이 예전보다 더 빨리 이 초코파이를 먹어 대기

시작하고(^^;) 새 초코파이를 사 오면 우선 그 상자부터 뜯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사람들 사이에 신경전까지 벌어지고 있다.

"예전에 우리 나라의 근본 사상은 충과 효였는데 이것이 점점 약해지고

있는 것 같아. 특히 효라는 건 장유유서란 훌륭한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말이야..."

이 한마디에 후배들은 눈물을 머금고(?) 내 앞에 꼬빌 세트 하나씩을

가져다 바친다. ^^;

* 왜냐믄 내가 실험실의 제일 대빵이거든... 음냐... :P  *




참 별것 아니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 아주 자그마한 이 조립식 건물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유행을 불러 일으켰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알록달록한 색상과 함께 참으로 정교한 이 집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상한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지금 내 머신 앞에 죽 늘어선 것들은 영화관과 꽃집, 제과점. 그리고

수퍼 마켓과 병원이다. 잠시만 엄지 공주처럼 작은 꼬맹이로 되돌아 가서

이 문들을 똑똑 두들겨 보면 어떨까? 영화관에선 내가 미쳐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한편의 영화가 상영 중일 것 같고 꽃집에선 가득한 향이 풍겨져

나오고 그 옆에서 갖구운 빵 한조각을 사들고 나면 참 마음이 푸근해

질 것만 같은데...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이 어린 시절의 어떤 내 꿈으로 이끌어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창문 너머로 들여다 보고 싶은 이 플라스틱 판지의 건물 안이

궁금해 진다. 빵을 구워 내고 있는 아저씨의 손놀림이 그립고 아프다고

칭얼대는 환자에게 한방 따끔한 주사를 놓아 주며 환하게 미소 지어

주는 간호사가 날 반겨 주지나 않을까?


늘 나의 키보다 커다란 건물의 안에서 갖혀 버린 모습이 아니라

이젠 나보다 키가 훨씬 작은 건물들의 아기자기한 모습들을 보면서

나 또한 그만큼 키가 작아지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곤 한다.

그렇게 조금만 작아져서 너무나 어려운 일들에 대한 부담은

조금만 덜어 버리고 작은 개미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 그대로

그렇게, 그렇게 마음 가득히 평화로워졌으면...


모두가 잠이 들어 버린 어느 날 밤, 나를 초대해 주지 않겠어요? 하고

말문을 열어 보며 저 작은 문을 두드리는 피터의 작은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그 문을 열어 나를 반겨 줄 사람이 누굴까 가만히

기대해 본다. 


계세요..... 거기 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