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목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요즈음 뜻하지 않게 독수공방 중이다.
어짜피 잘 때만 보니 늘 같이 지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하나의 방을 같이 쓰는 방돌이가 휴가를 갔기 때문이다.
휴가도 짧은 것이 아니라 장장(?) 일주일이나 된단다.
난 그 말을 들었을 때(우리 실험실은 주말 포함해서 3박 4일 정도이므로..)
너무 긴거 아니냐고 그랬는데 자기네 실험실은 늘 그랬단다.
하지만 지금 그 방돌이네 교수님이 안식년이라서 안 계신데
그 핑계가 조금은 섞인듯 싶었다. 말이 일주일이지 지난 토요일날
가면서 다음주 월요일에나 돌아 온단다. 아주 주말까지 톡톡히 챙기고
있는 셈이다.
방돌이가 떠나기 전, 나에게 한가지 부탁을 하고 떠났다.
무슨 부탁이냐 하면 자기 책상 위에 있는 행운목에 물이 마르지 않도록
2, 3일에 한번씩 물을 채워 달라는 것이다. 난 그 말을 듣고 정말이지
방이 떠나가라 웃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어느날 갑자기 방돌이의 책상을 차지해 버린 행운목은 자기 스스로
꽃집에 가서 사 온 것이 아니다. 방돌이의 여자 친구가 사 준 것이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몇달 전 그 여자 친구가 여기 놀러 왔다가
한바구니 선물을 두고 갔는데 그 안에 행운목이 있었던 것이었다.
방돌이는 행운목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같이 들어 있던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대뜸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너 이 행운목이 무얼 먹고 사는지 알아?"
"몰라."
"행운목은 사랑을 먹고 산데."
하하하하... 너 인제 죽었다. ^^;
말하자면 그 여자 친구가 방돌이에게 선사한 협박(?)인 셈이었다.
행운목은 사랑을 먹고 사니까 오빠와 나 사이에 사랑이 식으면
이 행운목은 죽고 말거라고,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잘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 행운목이 말라 버리는 날, 넌 끝이구나?" *!* 흐흐흐... *!*
방돌이의 안색이 확 변해 버리는 듯 싶었다. :)
그 후로 방돌이는 자신의 어떤 것보다도 이 행운목을 보살폈다.
실은 별로 신경 쓸 일은 없었다. 그냥 물이 다 떨어지기 전에 행운목
받침에 물만 가득 채워 두면 알아서 잘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낙에 엄청난 협박을 받아서 인지 가끔은 행운목 앞에 앉아
물걸레로 잎사귀의 먼지를 닦아 내고 있는 방돌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이구, 정말 길 잘 들이고 있네... ^^;
하루는 같이 티비를 보는데 아주 늘신한 미녀가 화면에 나왔다.
방돌이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정말 이쁘다고 감탄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난 한마디 해 주었다.
"야! 저 행운목 벌써 잎사귀 하나 말라 버렸다."
그 후론 다시는 티비를 보면서 침 삼키는 일은 없었다. :)
휴가를 떠나기 전 방돌이는 몇번씩이나 나에게 다짐을 시키며
물을 꼭 주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나도 워낙 바빴고 늘 한밤중에나
방에 들어 가게 되어서 그 약속을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제 저녁
잠자리에 누웠는데 그 행운목이 눈에 들어 오는 것이었다. 불을 켜고
살펴 보니 행운목 받침대엔 물이 약간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난 사다 놓은 생수를 가득히 부어 놓았다. 그리곤 피식 웃어 버렸다.
어떤 무언가가 있어서 두 사람의 사이를 이어 준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인것
같다. 때로는 그것이 제약이나 부담이 되더라도 말이다.
방돌이와 그 여자 친구 사이에는 이 행운목이 서로의 끈인가 보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쪼그리고 앉아서 행운목의 잎사귀를
정성스럽게 닦고 있던 방돌이의 모습을 떠 올릴 때면 그 얼굴에
서려 있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받침대의 물이 다 말라 버리지나
않았을까 늘 걱정하던 모습은 그 여자 친구가 오늘도 좋은 하루를
보냈을까 하는 모습으로 비추어 진다. 그저 하나의 작은 나무가
늘 다른 한 사람을 떠올리게 만드나 보다.
가끔씩 행운목을 쳐다 본다. 약간은 부러움의 시셈을 담기도 하면서...
언젠가 그 행운목에서 조그만 꽃이 피게 되면 두 사람의 사랑도
그 나무의 이름처럼 어떤 행운을 건져 올리게 되는 건 아닐까?
밤에 기숙사로 들어 갈 때는 휴게실에서 맨날 전화 붙잡고 있는
모습이 얄밉기도 하고, 주말엔 거의 대구에 가서 살아 독수공방하게
만들긴 하지만 그게 어쩌면 다 행운목이 사랑을 담뿍 먹고 크기 바라는
마음이라는 것도 이해하게 된다.
지금쯤엔 둘이 강원도 어딘가 있겠지? :)
사고 치지 않기를 빌어 보면서(^^;) 올 여름에는 너무나 기억에 남을
추억을 담고 돌아 오길 기대해 본다.
그리고, 둘의 사랑이 늘 푸른 행운목의 잎사귀처럼 푸르렀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