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 천사
*!* 이 글은 1994년에서 98년 사이에 KIDS라는 BBS에 썼던 글입니다. *!*
가끔은 말이죠, 아무런 이유없이 이렇게 통신상에 들어와 있곤 해요.
정말이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말이죠.
....
아니, 어떤 이유가 있는거 같아요.
오늘처럼 실험실이 텅 비어 버린 날이라든가 아니면 일이 잘 안 되어서
힘이 드는 날이면 이렇게 들어와 있곤 해요.
무얼 하냐구요? 음.. 아무 것도 안 해요. 그냥 유저란에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들을 보기도 하고 사람들이 적어 놓은 글을 읽기도 하지만
거의 아무 것도 안 해요.
유저란에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참 기분이 묘해요.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내 한복판에 있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죠.
스쳐 지나 가는 사람들이 서로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여러분들을
잘 모르죠. 그렇지만 어떤 위안을 얻어요. 난 혼자이지 않다는 느낌을
말이죠. 언젠가 어느 정신 분석학자가 그랬죠. 군중 속에 파 묻히고
싶은 개인의 심리가 있다고 말이죠. 사람들은 자신의 개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별의별 희안한 옷들을 입곤하지만 그게 너무 눈에 띄는 걸
싫어하죠. 그리고 다른 누군가 자기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때
위안을 느낀다고 해요. 나도 그런가봐요. 여러분들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저 여기 한곳에 같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위안을
가지게 되니까죠.
실은 며칠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몸도 피곤하고 말이죠.
이건 순전히 일이 잘 안 되었기 때문이에요.
결과가 너무 좋지 않게 나왔는데 그게 계속 제 마음 속을 긁어 대었죠.
그러니 너무 피곤했어요. 나의 한계라는 것도 느끼고 말이죠.
그렇지만 난 어디선가 기댈 곳이 없어죠. 말을 걸 사람도 혹은 같이
있고 싶은 사람도 별로 떠 오르지 않았어요.
아니 몇 사람은 있었죠. 하지만 어디서 무얼하는지 알 수 없었죠.
그리고 내가 가진 제일 안 좋은 점... 이런 내 마음을 그 사람에게
전하고 싶지 않았던 거에요...
그래서 더 더욱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위로를 받고 싶었었나
봐요. 혹시나 누군가 나에게 톡이라도 걸어 주면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할 수 있을텐데 말이죠. 그래요, 아마 그 이유 때문이었을꺼에요.
그렇게 유령처럼 광장을 떠돌았던 이유는 말이죠...
어젠 저녁을 먹고 나서 방에서 쉬었어요. 금요일 저녁은 내게 제일
편안한 시간이죠. 아무런 부담도 없고 말이죠.
음.. 아마 그 시간은 9시가 조금 지났을 때였을거에요.
맞아요. 난 9시 뉴스를 보고 있었거든요.
갑자기 삐삐가 울렸죠. 난 울리는 삐삐 소리를 들으며 누굴까 궁금했었죠.
그 짧은 시간에 떠올린 사람이 있었죠. 혹시나 그 사람이 아닐까
하고 말이죠. 아니면 나와 이야기 할 수 있는 그 어떤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어요. 음성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죠.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좋았거든요.
그러나 삐삐를 확인해 보았을 때 참 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왜 그런 기분이 들었냐구요? 그건 말이죠. 삐삐에 조금은 색다른
번호가 찍혀 있었기 때문이죠.
바로 1004 라는 번호가 말이죠.
음성도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전화 번호도 아니었죠.
그저 1004 만이 찍혀 있었어요.
난 아직도 그게 누군지 알지 못해요. 그래서 궁금하기도 하죠.
누군가 알아 보려고 생각도 했었어요. 나에게 그런 번호를 찍어 줄만한
사람들에게 모두 전화를 걸어 보려고 그랬죠. 그러나 금방 관 두었어요.
그냥 그 번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을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죠.
누군지 모르겠어요.. 누가 나의 수호 천사가 되고 싶었는지...
하지만 이거 하난 알게 되었어요. 어딘가 나의 수호 천사가 있다는
것을 말이죠. 오후 내내 외롭고 조금 힘들었지만 이런 느낌을 알아 주고
내게 힘을 내라는 작은 사인을 보내 주는 그 누군가가 말이죠.
이제는 그게 누군지 알아 내려고 노력하지 않을래요.
그냥 그렇게 어딘가 내 수호 천사가 있다는 걸 믿기로 했어요.
힘이 들 때 마다 그리고 어디엔가 의지하고 싶을 때 마다
늘 나를 지켜 주는 수호 천사가 있다는 걸...
그리고 열심히 할래요. 그 수호 천사가 나를 지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수호 천사에게 내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요.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만큼 나도 열심히 할래요...
나의 수호 천사가 누군지 나도 몰라요.
하지만, 어딘가에 있을 그 수호 천사를 위해 나도 기도해 볼래요.
나를 늘 지켜 보아 달라고 말이죠. 그리고 난 이제 다시 기운 내겠다고
말이죠.
그 수호 천사가 누군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중에 한분일지도...